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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광화문 광장에 ‘광장’이 없다니

등록 2009-10-09 19:43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여기서 ‘광장’이란 명백히 지난 20세기 중엽 한반도의 불구적인 정치 상황을 은유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대도시 중심가의 물리적 공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컨대 최인훈이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쫓으며 온 사람도 있다”고 썼을 때, 그것은 혼란 상태에 직면한 인간의 다양한 양태를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실제로 광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광장은 그런 곳이다. 유럽의 도시와 광장 문화를 연구한 프랑코 만쿠조는 <광장>에서 유럽의 역사가 곧 광장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광장은 일상생활의 통행과 회합과 교환의 장소이자 동시에 권력과 그 의지의 실현의 장이며 이제 저항하는 자들의 연대와 소통의 장이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광장은 그와 같은 공간이었다.

광장은 인류의 모든 활동이 수렴되고 확산되는 공간이며 장터이자 문화마당이고 예술이 구현되는 장이며 더 많은 자유를 향한 열정이 집결하는 장이었다. 특히 근대 사회 이후 광장의 이런 기능과 열망은 확연한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권력의 의지가 무지막지하게 발현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자유의 열망이 바로 광장에서 빚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작가들이 광장을 소재와 주제로 하여 작품을 썼다. 그 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광장의 경건성에 대한 가장 위엄 있는 작품일 것이다. 독단적인 사상에 사로잡혀 충격적인 살인을 범한 라스콜리니코프는 거리의 여자 소냐로부터 거룩한 위로와 사면을 받고는 광장으로 걸어 나간다.

“광장의 복판까지 왔을 때, 그의 가슴에는 갑자기 어떤 충동이 일어났다.” 그때 그의 귀에 환청이 들려온다. 아니 환청이 아니라 소냐가 그에게 자비롭게 명령한 따스한 목소리였다. “네거리에 나가서 모든 사람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땅바닥에 키스하세요. 당신은 대지에 대해서 죄를 범했으니까요.” 그리하여 라스콜리니코프는 “광장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몸을 굽혀 환희와 행복을 느끼면서 그 더러운 대지에 키스”를 한다.

1920년대 독일 사회를 그린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도 대혼란 시대의 나약함과 죄의식을 넘어서고자 하는 한 개인의 고뇌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베를린 동부 지역의 알렉산더 광장에서 ‘다른 삶’을 발견한다. “더는 혼자 서 있지 않는다. 그의 오른쪽과 왼쪽에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사람들이 가고 그의 뒤에 사람들이 간다.” 이 연대의식을 강조하면서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말한다. “대기는 우박과 비를 내릴 수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많은 것은 막을 수 있다. 나는 더는 옛날처럼 운명이다, 운명이다 하고 소리 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걸 붙잡고 파괴해야 한다.”


이처럼 광장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널찍한 도심 속의 공간이 아니라 밀실의 개인이 공포와 외로움을 이겨내고 좀더 넓고 따스한 공동체로 스며드는 통로인 것이다. 이를 절실히 보여준 작품은 레마르크의 <개선문>이다. 지금은 샤를 드골 광장으로 불리지만 파리지앵들은 여전히 에투알 광장이라고 부르는 그곳에 개선문이 있고, 그 아래에서 나치 수용소를 탈출한 외과 의사 라비크가 벼랑 끝에 선 채로 희미한 사랑의 끈을 붙잡게 된다. 소설의 끝에서 레마르크는 “광장은 어둠에 잠겼다. 빛은 없었다. 거대한 개선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썼지만, 그래도 ‘괴로울 때는 하찮은 일에서도 위안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믿음만큼은 남겨준다.

광화문 광장에 나가보았다. 거대한 중앙분리대! 그곳은 광장이 아니라 국가주의적 미학에 봉사하는 크고 작은 조형물이 지배하는 공원이었다. 문화 정치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세종대왕의 동상은 오늘날의 세련된 미학은 물론 조선 초기의 통치 이념과도 무관한, 저 1970년대의 기념비적인 영웅상으로 세워져 있고, 지하로 이어지는 거대한 통로에는 서울시의 홍보 영상이 쉬지 않고 흐른다. 그곳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정념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공간, 곧 광장이 아니었다.

소설가 이기호는 세종로의 큰 서점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 ‘수인’을 썼다. 이 소설은 끔찍한 재앙 이후의 그로테스크한 도시 상태를 상상하여 그린 것인데, 이벤트 공간으로 전락해버린 오늘의 광화문 광장과 세종로 일대를 보면 결코 그로테스크한 상상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기호는 썼다. “도로 이곳저곳엔 유리가 깨지고 보닛이 우그러진 차들이 사선으로, 혹은 뒤집힌 채 방치되어 있었다. 가로수들은 뿌리를 온전히 다 드러낸 채 말라 죽어가고 있었고, 도로에 면해 있는 고층건물들은 하나같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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