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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임시저장 폴더의 짤방과 움짤 엮기

등록 2015-02-13 20:18수정 2015-02-14 11:21

드라마 <킬미, 힐미>
드라마 <킬미, 힐미>
[토요판] 안인용의 미래TV전략실
우리는 ‘지금’이 언제인지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티브이 채널에서는 언제 방영됐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재방송’들이 ‘지금’ 이 순간 쉴 새 없이 돌아가고, <무한도전-토토가 특집>에서 경험했듯 1990년대의 유행가는 무대까지 그대로 재현하며 십수년 전의 순간들을 ‘지금’ 소환한다. 또 그 시절 ‘에스이에스’는 지금의 ‘에이핑크’로, 데뷔 초의 ‘소녀시대’는 신인 걸그룹 ‘여자친구’로 시간을 달려 ‘지금’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춘다. 물론 이 모든 시간여행은 통로가 티브이일 필요는 없다. 인터넷 검색창을 두들기는 것만으로 언제 어디에서든 가능한 경험이다. 인터넷 검색창은 다른 시간대로 어디든 ‘점프’할 수 있는 타임머신의 출입구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지금’이 그 의미를 잃어버리면서 우리의 기억 역시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토토가’ 특집을 보면서 어떤 가수가 언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순서를 정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드라마가 언제 방영됐는지, 어떤 배우가 누구와 함께 출연해 어떤 캐릭터를 연기했는지도 마찬가지다. 인상적인 몇 개의 순간을 ‘짤방’이나 ‘움짤’로 만들어 머릿속에 ‘임시 저장’하고, 새로운 검색어가 입력되면 재빠르게 기억을 검색해서 유사한 이미지를 불러와 다시 한번 감상할 따름이다.

최근 수목드라마 시청률 1위인 <문화방송>의 <킬미, 힐미>(사진) 덕분에 임시저장 폴더가 꽤 바쁘게 움직였다. 수많은 짤방과 움짤을 꺼내오느라 말이다. 먼저 주연 배우, 지성과 황정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에서 2013년 둘이 함께 출연한 드라마 <비밀>의 명장면들이 검색됐다. 그다음,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와 그의 주치의인 정신과 의사의 로맨스라는 설정과 황정음의 쌍둥이 오빠가 추리소설 작가라는 설정은 자동으로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를 찾아냈다. 물론 비슷한 설정의 드라마 <하트 투 하트>와 <하이드 지킬, 나>는 이미 연관검색어다. 또 황정음이 의사 가운을 입고 있을 때는 <골든 타임>이, 유쾌발랄하게 웃고 떠들 때는 <지붕 뚫고 하이킥>이 떠오른다. 지성이 갖고 있는 7개의 인격들 면면에는 그가 <비밀>이나 <보스를 지켜라>에서 연기했던 캐릭터들과 너무나 ‘전형적’이라서 대중문화 코드가 되어버린 캐릭터들이 뒤섞여 있다. 신세기는 ‘병신 같지만 멋있는’, 만화에나 등장할 법한 캐릭터 그대로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페리 박과 염세주의에 빠진 천재 고등학생 안요섭, 까칠한 ‘빠순이’ 안요나까지 수없이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봐온 캐릭터들을 빼다 박았다.

조연들도 마찬가지다. 지성의 첫사랑을 연기하는 김유리를 보면 <주군의 태양>과 <청담동 앨리스>에서 맡았던 서늘한 미녀들이, 지성의 할머니인 김영애가 등장하면 <로열 패밀리>의 악독한 공순호 회장이, 지성의 비서인 안 실장 최원영을 보면 <상속자들>의 윤 실장이 떠오른다. 황정음의 아버지 역으로 나오는 박준규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봐왔던 철없는 아빠 자신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연기를 한다. 또 이 드라마는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의 셀카봉 촬영 장면이나 <포켓몬스터>의 한 장면을 패러디하는 등 드라마 밖의 요소들도 드라마 안으로 끌어온다.

<킬미, 힐미>는 사람들 기억 속의 임시저장 폴더를 매우 영리하게 활용한다. 먼저 폴더 안 움짤과 짤방을 ‘고퀄’(고퀄리티)로만 뽑았다. 연기자나 캐릭터를 떠올렸을 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와 대중문화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접속 가능한 코드로 잘 모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를 이야기라는 실로 잘 꿰었다. 소설가인 황정음의 오빠와 지성의 가족들이 ‘떡밥’을 하나둘씩 흘리고 이에 대한 비밀을 찾아가는 추리소설의 스토리텔링과 지성의 수많은 자아들을 확인하는 게임의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몰입도를 높였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다.

이야기나 캐릭터의 독창성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설령 독창성으로 한 획을 긋는다고 해도 그 획은 임시저장 폴더에 잠시 몸을 맡기는 팔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서 빨리 그 팔자를 받아들이고 거꾸로 그 폴더 안에 저장된 수많은 짤방이나 움짤을 소환하고 잘 엮어 ‘시너지’를 노리는 것, 그것이 ‘지금’ 대중문화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안인용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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