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현과 한여진의 러브라인이 시작되기 전까지 적어도 <용팔이>는 뛰어난 한국형 히어로물과 메디컬 드라마이자 기업 드라마였다. <에스비에스>(SBS) 제공
[토요판] 안인용의 ‘좋아요’가 싫어요
오랜만에 ‘2’ 자를 봤다. 에스비에스 수목드라마 <용팔이>가 올해 방송된 지상파 미니시리즈 드라마 중에 처음으로 시청률 20%를 기록했다. <용팔이>는 1회를 11.6%(닐슨코리아)로 시작해 2회, 3회 지나면서 시청률이 쭉쭉 오르더니 6회에서 20.4%를, 8회에서 20.5%를 기록했다. 시청자를 끌어당길 줄 아는 주원과 ‘예쁨’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김태희, 두 주연배우의 이름값이면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차승원, 하지원, 이준기, 여진구 등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배우들도 10% 문 앞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김수현에 공효진, 아이유, 차태현까지 출연한 한국방송 <프로듀사>는 최종회 시청률이 17.7%였다. 문화방송 <킬미힐미>나 에스비에스 <풍문으로 들었소> 등도 화제가 됐지만 시청률은 10%대에 머물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 것처럼 드라마 역시 작품성은 시청률순이 아니지만, 그래도 드라마의 트렌드를 확인하는 데 시청률은 여전히 유효한 지표다. 특히 20~40대를 주요 시청층으로 하는 미니시리즈가 20%를 넘겼다는 것은 그 드라마에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얘기다.
<용팔이>는 용한 돌팔이 의사라서 ‘용팔이’라고 불리는 주인공 김태현(주원)의 별명을 제목으로 썼다. 이런 식의 제목 짓기는 <아이언맨>이나 <스파이더맨>, <배트맨> 등 슈퍼히어로물을 떠올리게 한다. 슈퍼히어로물의 지극히 한국적인 버전임을 제목으로 웅변하고 있듯이 이 드라마는 용팔이의, 용팔이에 의한, 용팔이를 위한 드라마다. 용팔이 김태현은 최근 드라마 남자주인공들 중에 단연 눈에 띄는 캐릭터다. 아픈 여동생과 수술도 받지 못하고 죽은 어머니에 망나니 아버지까지 가정환경에 대한 설정은 진부하고, 외과의사로서 타고난 실력 덕분에 모든 환자를 살려내는 설정은 뻔하지만, 주인공이 드라마에서 생각하고 움직이고 결정하는 패턴은 그렇지 않다. 돈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 필요하면 바로 무릎을 꿇는 것도 마다하지 않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외면하지 못한다. 돈의 속성과 돈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을 잘 알기 때문에 이용할 줄도 안다. 그래서 예측 불가능하다. 드라마는 초반의 방송 분량을 대부분 김태현에게 몰아주며 김태현의 고군분투기를 투박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펼쳐놓는다. 흥미로운 김태현의 캐릭터와 지상파 드라마에서는 접하기 힘든 속도감은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기에 충분했다.
<용팔이>의 배경은 병원이지만 드라마의 중심에는 병원 응급실이나 수술실이 아니라 12층 브이아이피(VIP)실이 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환자가 아닌 ‘고객님’으로 모시며 특별한 치료와 서비스를 제공하고, 위급할 때는 일반 환자의 생명과 우선순위를 조정해 어떻게든 살려내는 곳이 12층 브이아이피실이다. 이 드라마는 브이아이피실의 생리와 브이아이피실을 욕망하는 의사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 김태현의 어머니 에피소드나 무연고 환자 에피소드, 폭파 위기에 처한 병원 에피소드 등을 통해 ‘두 개의 수술방에 누운 환자 두 명의 목숨은 같은 무게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던진다. 드라마이기에 과장된 부분이 있겠지만, 브이아이피실은 현실이다. 가족이 아프면 지인을 총동원해 큰 병원 의사에게 ‘잘 봐달라’고 전화 한 통을 더 넣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고, 재벌 회장들이 입원했다는 뉴스를 통해 엿보는 그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브이아이피실의 제한구역에 코마 상태로 누워 있는 대기업 상속녀 한여진(김태희)의 모습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병실을 찍은 사진과 겹쳐진다. 한여진의 생사를 두고 펼쳐지는 치열한 경영권 전쟁은 또 하나의 이야기 축으로 극에 긴장감을 더한다. <용팔이>는 속도감이 뛰어난 한국형 히어로물이고 문제의식이 뚜렷한 메디컬 드라마이며 동시에 경영권을 둘러싼 기업드라마다. 아니, 그런 드라마‘였’다. 김태현과 한여진의 러브라인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문제는 강박적 러브라인
김태현이 한여진을 사랑하게 되면서
드라마의 특별함이 모두 무너져
후반부선 그저 그런 평범한
K드라마가 되지 않길 서로에게 호감 정도의 감정만 갖고 있던 김태현과 한여진은 8회에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뜬금없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키스를 나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바람의 언덕에 올라 영원을 약속하고, 발마사지를 해주며 애칭을 부르는 등 영혼없는 장면들을 잇달아 보여주며 ‘이것은 사랑입니다!’를 외친다. 러브라인, 물론 필요하다. 선남선녀가 남녀 주인공으로 있으니 둘의 달달한 사랑은 극의 필수요소다. 문제는 강박적인 러브라인이 드라마의 특별함을 모두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김태현이 한여진을 사랑하게 되면서 속물적인 용팔이의 자아는 사라지고 사랑을 맹세하는 사랑꾼의 자아만 한없이 커진다. 김태현을 움직이는 힘이 사랑이 되면서 김태현은 지금까지 수없이 봐온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지금은 혼자 잘 걸을 수도 없는 처지라고 해도 엄연한 대기업의 후계자이자 돈으로 쌓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한여진은 김태현이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편’이 된다. 투신한 노동자의 에피소드나 불법체류 노동자의 출산 에피소드 등은 둘을 만나게 하거나 떨어뜨리기 위한 계기로 이용되는 데 그친다. 브이아이피실로 대표되는 시스템의 안팎을 오가며 통쾌함을 선사해야 할 김태현이 결국 한여진이 오빠를 끌어내리고 경영권을 얻기 위한 복수의 조력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 드라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케이(K)드라마’가 되어가고 있다. 복잡한 얘기는 다 접고 모두가 사랑타령만 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용팔이>가 보여준 러브라인의 힘이다. 러브라인이 시작된 9회 시청률은 17%로 떨어졌다. 러브라인은 참 어렵다. 있어도 어렵고, 없어도 어렵다. 올해 지상파 미니시리즈 드라마에는 새로운 시도들이 꽤 있었다. 러브라인이 없거나 남녀 주인공의 해피엔딩이 목표가 아닌 드라마도 새로운 시도들 중 하나였다. 에스비에스 <펀치>와 <풍문으로 들었소>, <미세스 캅>을 비롯해 문화방송 <앵그리맘>, 한국방송 <어셈블리> 등이 그렇다. 이야기를 주제 중심으로 밀고 가기 때문에 일관성이 있고 메시지의 힘도 있다.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러브라인이 주는 설렘이 없어 그만큼의 재미를 다른 이야기가 제대로 메꿔주지 않으면 중반 이후에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피로가 느껴지기도 한다. 반대로 케이블 드라마는 올해 로맨틱 코미디가 주를 이뤘다. 티브이엔 <구여친클럽>, <하트투하트>, <호구의 사랑> 등 러브라인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들은 이야기가 다소 밋밋하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이렇게 균형 잡기가 힘든 러브라인을 절묘한 비율로 성공시킨 드라마가 있다. 최근 종영한 티브이엔의 <오 나의 귀신님>(이하 <오나귀>)이다. 케이블 드라마임에도 최종회 시청률 7.3%(닐슨코리아)를 기록한 <오나귀>는 처녀귀신이 빙의한 소심한 주방 보조 나봉선(박보영)과 스타 셰프 강선우(조정석)의 로맨스 이야기다. 줄거리 설명만 보면 그저 그런 드라마일 것 같지만 실제 드라마는 대단히 특별했다. 이 드라마는 나봉선과 강선우, 그리고 나봉선에 빙의한 귀신 신순애(김슬기)의 삼각 로맨스와 귀신 신순애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는 추리물, 두 개의 이야기 축으로 진행되는데 서로 다른 성격의 이야기들의 균형이 잘 잡혔다. 러브라인과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두 개의 이야기를 오가며 캐릭터들이 더 분명해졌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 한 회에서 러브라인이 주는 설렘과 추리물이 주는 긴장감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이 드라마에서 모든 캐릭터들은 사랑뿐만 아니라 연민과 이해, 분노 등 저마다 다양한 감정과 욕망에 따라 움직였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남녀 주인공의 사랑만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러브라인과 추리물이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케이블 드라마로 최종회 시청률 8.2%를 기록한 지난해 화제작 <미생>과 올해 <오나귀>, 그리고 <용팔이>의 시청률 추이를 보면 지금 대중이 원하는 이야기는 사랑이 전부가 아닌, 인생이 사랑을 포괄하는 이야기라고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용팔이>는 이제 전체 20부작의 절반을 막 넘었다. 다행히 10회에서는 김태현이 병원으로 돌아오고 한여진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면서 둘의 러브라인은 일시정지됐다. 11회부터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둘의 사랑이 이야기의 전부가 되지 않길, 초반에 던져놓은 흥미로운 질문에 대해 <용팔이>다운 대답을 줄 수 있길 기대한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관련 영상] ‘짬뽕 막장’ <용팔이>…‘주원만 보였네’ /[잉여싸롱#87]
김태현이 한여진을 사랑하게 되면서
드라마의 특별함이 모두 무너져
후반부선 그저 그런 평범한
K드라마가 되지 않길 서로에게 호감 정도의 감정만 갖고 있던 김태현과 한여진은 8회에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뜬금없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키스를 나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바람의 언덕에 올라 영원을 약속하고, 발마사지를 해주며 애칭을 부르는 등 영혼없는 장면들을 잇달아 보여주며 ‘이것은 사랑입니다!’를 외친다. 러브라인, 물론 필요하다. 선남선녀가 남녀 주인공으로 있으니 둘의 달달한 사랑은 극의 필수요소다. 문제는 강박적인 러브라인이 드라마의 특별함을 모두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김태현이 한여진을 사랑하게 되면서 속물적인 용팔이의 자아는 사라지고 사랑을 맹세하는 사랑꾼의 자아만 한없이 커진다. 김태현을 움직이는 힘이 사랑이 되면서 김태현은 지금까지 수없이 봐온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지금은 혼자 잘 걸을 수도 없는 처지라고 해도 엄연한 대기업의 후계자이자 돈으로 쌓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한여진은 김태현이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편’이 된다. 투신한 노동자의 에피소드나 불법체류 노동자의 출산 에피소드 등은 둘을 만나게 하거나 떨어뜨리기 위한 계기로 이용되는 데 그친다. 브이아이피실로 대표되는 시스템의 안팎을 오가며 통쾌함을 선사해야 할 김태현이 결국 한여진이 오빠를 끌어내리고 경영권을 얻기 위한 복수의 조력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 드라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케이(K)드라마’가 되어가고 있다. 복잡한 얘기는 다 접고 모두가 사랑타령만 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용팔이>가 보여준 러브라인의 힘이다. 러브라인이 시작된 9회 시청률은 17%로 떨어졌다. 러브라인은 참 어렵다. 있어도 어렵고, 없어도 어렵다. 올해 지상파 미니시리즈 드라마에는 새로운 시도들이 꽤 있었다. 러브라인이 없거나 남녀 주인공의 해피엔딩이 목표가 아닌 드라마도 새로운 시도들 중 하나였다. 에스비에스 <펀치>와 <풍문으로 들었소>, <미세스 캅>을 비롯해 문화방송 <앵그리맘>, 한국방송 <어셈블리> 등이 그렇다. 이야기를 주제 중심으로 밀고 가기 때문에 일관성이 있고 메시지의 힘도 있다.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러브라인이 주는 설렘이 없어 그만큼의 재미를 다른 이야기가 제대로 메꿔주지 않으면 중반 이후에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피로가 느껴지기도 한다. 반대로 케이블 드라마는 올해 로맨틱 코미디가 주를 이뤘다. 티브이엔 <구여친클럽>, <하트투하트>, <호구의 사랑> 등 러브라인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들은 이야기가 다소 밋밋하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이렇게 균형 잡기가 힘든 러브라인을 절묘한 비율로 성공시킨 드라마가 있다. 최근 종영한 티브이엔의 <오 나의 귀신님>(이하 <오나귀>)이다. 케이블 드라마임에도 최종회 시청률 7.3%(닐슨코리아)를 기록한 <오나귀>는 처녀귀신이 빙의한 소심한 주방 보조 나봉선(박보영)과 스타 셰프 강선우(조정석)의 로맨스 이야기다. 줄거리 설명만 보면 그저 그런 드라마일 것 같지만 실제 드라마는 대단히 특별했다. 이 드라마는 나봉선과 강선우, 그리고 나봉선에 빙의한 귀신 신순애(김슬기)의 삼각 로맨스와 귀신 신순애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는 추리물, 두 개의 이야기 축으로 진행되는데 서로 다른 성격의 이야기들의 균형이 잘 잡혔다. 러브라인과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두 개의 이야기를 오가며 캐릭터들이 더 분명해졌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 한 회에서 러브라인이 주는 설렘과 추리물이 주는 긴장감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이 드라마에서 모든 캐릭터들은 사랑뿐만 아니라 연민과 이해, 분노 등 저마다 다양한 감정과 욕망에 따라 움직였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남녀 주인공의 사랑만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러브라인과 추리물이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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