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의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인물을 ‘납작하게’ 만들어 시청자가 인물보다 우위에 서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의 인물들은 시청자의 거울이 된다는 점에서 미덕이 있다. 에스비에스 주말드라마 <그래, 그런거야>의 한 장면. 에스비에스 갈무리
[토요판] 안인용의 ‘좋아요’가 싫어요
이른 아침, 이층짜리 단독주택의 안방에 불이 켜진다. 내복을 입은 할아버지(이순재)가 국민체조 구령에 맞춰 체조를 시작한다. 그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아내(강부자)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어디 아퍼? 안 일어날겨? 안 죽었으면 어이 일어나.” 아내가 이불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어 다른 방 침대에서 자고 있던 며느리(김해숙)가 목을 가다듬으며 일어나 옷을 입고 세수를 한 다음 부엌으로 들어간다. 드라마 첫 회가 시작된 지 3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 장면만으로도 이 드라마가 누구의 작품인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이순재와 강부자가 부부로, 김해숙이 부지런한 며느리로 출연하는 드라마라면 99%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다.
김수현 작가가 집필하는 에스비에스 주말드라마 <그래, 그런거야>가 지난주 토요일 첫 방송을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무자식 상팔자>(2012)와 <인생은 아름다워>(2010) 등 김 작가의 이전 가족드라마들처럼 80대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60대인 아들과 며느리, 30대인 손주 등 3대로 구성된 대가족의 이야기를 그대로 쓰고 있다. 3대가 모여 사는 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헌신적인 며느리는 대가족의 핵심 관리자로 많은 갈등을 조율한다. 손녀는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격이고, 손자는 곁을 주지 않는 의사이며, 붙임성 있는 막내는 공부에 뜻이 없다. 가족 구성원들은 저마다 사별, 재혼, 이혼 등의 사연이 있고 나이, 학력, 경제력 등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는데 이를 애써 감추지 않는다. 배우들은 이순재, 강부자, 김해숙을 비롯해 송승환, 임예진, 양희경 등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얼굴들이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단독주택 내부와 소품 역시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이제 막 시작한 드라마인데 오래된 혹은 오래 봐온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김수현 작가는 여러 번의 이혼이나 재혼, 결혼을 원치 않는 비혼, 동거, 미혼모, 아이를 원치 않는 부부, 장애아동, 동성애까지 다양한 삶의 방식과 그로 인한 갈등을 드라마의 한가운데 놓고 정면으로 다룬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그러한 모습을 교정하려 하거나 특정 가족 구성원의 희생을 요구하거나 갈등을 도려내버리는 대신 끝없는 설득과 이해를 통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갈등과 관계들을 품어낸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드라마 속 인물들이 대체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합리적 개인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가족은 그 넓이와 깊이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고 그 안에서 개개인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이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이번 드라마는 아들과 아내를 잃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며느리가 5년 동안 한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앞으로 이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포함해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펼쳐놓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전작들에 비해 문제의 난이도가 높지는 않다. 문제는 스포일러나 다름없는 등장인물들이다. 우리는 이미 김해숙이 연기하는 며느리이자 어머니가 동성애자인 아들과 미혼모인 딸을 품어내는 걸 목격했다. 고작 2회가 방영됐지만 김해숙의 근심과 불안이 앞으로 어떤 곡선을 그리게 될지, 또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게 될지, 그럴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대사를 하게 될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된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나 긴장감이 낮다. 난이도가 높은 갈등을 과감히 끌어안고 가는 것에 비해 막상 드라마 속에서 펼쳐지는 가족의 일상과 성역할은 그대로다. 드라마 첫 회부터 증조할아버지, 그러니까 극중 89세인 이순재의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내용을 다루면서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며느리의 하루를 보여줄 때는 이 드라마를 계속 볼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대가족 이야기 ‘그래 그런거야’
사별·재혼·이혼 등 상처에다
나이·학력·경제력 콤플렉스 이순재·강부자·김해숙 그 얼굴
송승환·임예진·양희경 낯익어
새 드라마인데 오래 봐온듯 부족하든 넘치든, 동의하든 않든
할말은 꼭 하다보니 수다스러움
중요한 건 자기를 돌아본다는 점
가족이란 이름으로 갈등 풀어가 아직까지 <그래, 그런거야>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 대한 기대치에는 못 미친다. 보수적인 가족 이야기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늘 새로운 이슈를 던져온 작가가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잘 잡히지 않고, 이야기의 외피를 조금만 바꿔도 드라마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을 텐데 여전히 익숙한 설정과 얼굴들을 밀고 가는 고집스러움이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고집스러움이 한편으로는 고맙다.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김수현 드라마의 드라마 속 인물들 얘기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작가의 다른 드라마들 속 인물들과 다르지 않다. 할 말이 있으면 꼭 한다. 생각이 옳든 그르든, 부족하든 넘치든 다 털어놓는다. 동의하지 않거나 납득하지 못하거나 지적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얘기한다. 그러다보니 대사가, 말이 많다. 그 말들은 서로를 어긋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보다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그 간격을 좁히면서 합의점을 찾아내도록 하거나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의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 첫 회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까다로운 성격의 둘째 아들(송승환)은 자신과 정반대의 느긋한 성격을 가진 아내(정재순)에게 툭하면 소리를 지른다. 가족끼리 모여서 얘기를 나누다가 둘째는 또 아내에게 “나서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이를 본 첫째 아들(노주현)은 동생의 행동을 서슴없이 지적하며 “너 잘못이야. 제수씨한테 왜 그래?”라고 말한다. 그런 첫째 아들에게도 단점은 있다. 평소에는 한없이 젠틀하지만 술만 마시면 침을 뱉는 주사가 있다. 가족 모임에서 술을 많이 마신 그는 어김없이 주사를 부리고, 다음날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한다. 그런 그에게 그의 며느리는 이렇게 말한다. “주무시기 전에 처절하게 반성하세요.” 그는 며느리의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알았어, 아까부터 처절하게 반성하고 있어”라고 대답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옳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하고 무례를 범하기도 한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 인물들은 그 순간들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이를 말로 표현하고 전달하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지금의 자신을 지키며 퇴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티브이를 켜면 일주일 내내 아침저녁으로 드라마가 돌아가고, 스마트폰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드라마를 불러온다. 셀 수 없이 많은 드라마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억울한 일을 겪어 누군가에게 복수하려는 인물, 더 부자가 되거나 성공하려는 인물은 넘쳐난다. 그러나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인물,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인물, 비난이나 변명이 아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비단 드라마의 문제만은 아니다. 스크린에서 천만 관객을 부르짖는 영화 속 주인공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종편채널의 뉴스와 토크쇼의 사람들, 젊은 세대가 주로 찾는 커뮤니티 게시판과 웹툰 속 사람들, 현실에서 직간접적으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막장’이라고 여겨지는 이야기는 자극적인 소재나 전개도 문제지만 그보다 인물을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욕망과 생각, 행동, 말이 한없이 평면적인 인물들은 좋아하기도, 미워하기도 쉽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기준을 한없이 낮추게 하고, 그 이야기를 보는 자신을 상대적으로 쉽게 그 인물들보다 우위에 놓게 하고, 자기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멈춰 있는지 뒤로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할 수 없게 한다.
김수현 작가는 드라마 방영 전 <연합뉴스>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막장’ 드라마에 대한 우려를 이렇게 표했다. “(막장이 넘쳐서) 내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내가 막장을 쓸 수는 없지 않나. 나는 정말 상스러운 게 싫다. 현실이 어떻든 인간의 모습이 상스러운 것을 티브이에서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방송사가 광고를 팔아먹는 데는 도움이 됐겠군.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뭔가를 써내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은 드라마 속 인물들의 말이 그러하듯 우회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말은 때로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그 불편함을 ‘나를 가르치려 든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나를 돌아보게 한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작가가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드라마를 써올 수 있었던 것은 후자의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후자의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고 믿는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사별·재혼·이혼 등 상처에다
나이·학력·경제력 콤플렉스 이순재·강부자·김해숙 그 얼굴
송승환·임예진·양희경 낯익어
새 드라마인데 오래 봐온듯 부족하든 넘치든, 동의하든 않든
할말은 꼭 하다보니 수다스러움
중요한 건 자기를 돌아본다는 점
가족이란 이름으로 갈등 풀어가 아직까지 <그래, 그런거야>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 대한 기대치에는 못 미친다. 보수적인 가족 이야기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늘 새로운 이슈를 던져온 작가가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잘 잡히지 않고, 이야기의 외피를 조금만 바꿔도 드라마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을 텐데 여전히 익숙한 설정과 얼굴들을 밀고 가는 고집스러움이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고집스러움이 한편으로는 고맙다.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김수현 드라마의 드라마 속 인물들 얘기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작가의 다른 드라마들 속 인물들과 다르지 않다. 할 말이 있으면 꼭 한다. 생각이 옳든 그르든, 부족하든 넘치든 다 털어놓는다. 동의하지 않거나 납득하지 못하거나 지적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얘기한다. 그러다보니 대사가, 말이 많다. 그 말들은 서로를 어긋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보다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그 간격을 좁히면서 합의점을 찾아내도록 하거나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의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 첫 회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까다로운 성격의 둘째 아들(송승환)은 자신과 정반대의 느긋한 성격을 가진 아내(정재순)에게 툭하면 소리를 지른다. 가족끼리 모여서 얘기를 나누다가 둘째는 또 아내에게 “나서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이를 본 첫째 아들(노주현)은 동생의 행동을 서슴없이 지적하며 “너 잘못이야. 제수씨한테 왜 그래?”라고 말한다. 그런 첫째 아들에게도 단점은 있다. 평소에는 한없이 젠틀하지만 술만 마시면 침을 뱉는 주사가 있다. 가족 모임에서 술을 많이 마신 그는 어김없이 주사를 부리고, 다음날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한다. 그런 그에게 그의 며느리는 이렇게 말한다. “주무시기 전에 처절하게 반성하세요.” 그는 며느리의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알았어, 아까부터 처절하게 반성하고 있어”라고 대답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옳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하고 무례를 범하기도 한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 인물들은 그 순간들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이를 말로 표현하고 전달하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지금의 자신을 지키며 퇴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티브이를 켜면 일주일 내내 아침저녁으로 드라마가 돌아가고, 스마트폰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드라마를 불러온다. 셀 수 없이 많은 드라마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억울한 일을 겪어 누군가에게 복수하려는 인물, 더 부자가 되거나 성공하려는 인물은 넘쳐난다. 그러나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인물,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인물, 비난이나 변명이 아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비단 드라마의 문제만은 아니다. 스크린에서 천만 관객을 부르짖는 영화 속 주인공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종편채널의 뉴스와 토크쇼의 사람들, 젊은 세대가 주로 찾는 커뮤니티 게시판과 웹툰 속 사람들, 현실에서 직간접적으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막장’이라고 여겨지는 이야기는 자극적인 소재나 전개도 문제지만 그보다 인물을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욕망과 생각, 행동, 말이 한없이 평면적인 인물들은 좋아하기도, 미워하기도 쉽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기준을 한없이 낮추게 하고, 그 이야기를 보는 자신을 상대적으로 쉽게 그 인물들보다 우위에 놓게 하고, 자기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멈춰 있는지 뒤로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할 수 없게 한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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