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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선거캠페인들과 ‘부장님 개그’

등록 2016-04-01 18:52수정 2016-04-02 10:30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총선 투표 독려 영상인 ‘설현의 아름다운 고백’ 시리즈는 성별 고정관념에 기반한 선입견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논란이 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총선 투표 독려 영상인 ‘설현의 아름다운 고백’ 시리즈는 성별 고정관념에 기반한 선입견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논란이 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토요판] 안인용의 ‘좋아요’가 싫어요
엠넷 예능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의 주제곡 ‘픽 미’, 티브이엔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신세계닷컴의 ‘쓱’(SSG) 광고, 엠넷 <슈퍼스타케이(K)7>에 출연했던 ‘중식이’ 밴드, 한국방송 드라마 <부탁해요, 엄마>에 출연했던 탤런트 조보아, 걸그룹 ‘에이핑크’ 그리고 걸그룹 ‘에이오에이’(AOA)의 멤버이자 탤런트인 설현. 최근에 화제였거나 지금 화제인 노래, 작품, 사람들을 쭉 적어놓은 것 같은 이 목록은 서로 그다지 상관없어 보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당들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젊은층’을 상대로 진행하는 캠페인에 등장하는 대중문화의 소재들이라는 점이다. 두번째 공통점은 이 소재들이 선거 관련 캠페인에 등장하는 이유이자 목적이 “젊은층과 소통하기 위해서”라는 점이고, 마지막 공통점은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중이라는 점이다.

왜 젊은층을 대상으로 하는 선거 캠페인은 늘 실패할까. “안 봐도 비디오”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쓸 수 있을 것 같다. 선거가 다가오면 선관위는 “요즘 애들 버릇없어”에 비견될 만큼 오래된 숙제이자 난제인 “요즘 애들 투표 안 해”를 놓고 고민에 빠진다. 각 정당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젊은층이 우리를 지지할까”라는, 평소에는 덮어두었다가 선거라는 행사가 가까워질 때만 ‘변수’라고 부르며 꺼내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정당과 선관위의 고민은 다르지만 이들이 집어드는 카드는 항상 같다. “요즘 젊은이들은 뭘 좋아하나?” 실무진은 외주업체와 함께 대중문화에서 가장 ‘핫’한 트렌드를 찾고 일부 변형해 선거와 접붙이는 방식을 제안하고,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들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단히 유행”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는 ‘젊은층’이라는 문제에 가장 접근하기 쉬운 방법이자, 어쨌든 하면 티가 나는 방법이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요즘 티브이와 인터넷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봐야 하는 수많은 캠페인이다.

뉴스를 틀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가 나란히 빨간색 옷을 입고 서서 “픽 미 픽 미 픽 미 업, 누리 누리 새누리 기호 1번 새누리”에 맞춰 옅은 미소와 함께 허공에서 팔을 휘젓는 모습이 나온다. 인터넷에는 새누리당 이학재 후보가 빨간색 스냅백을 거꾸로 쓰고 나와 박자를 무시한 채 ‘픽 미’ 춤을 추다가 사랑의 총알을 쏘는 장면이 돌아다닌다. 선관위가 제작한 선거 캠페인 영상도 만만치 않다. 공효진과 공유 역의 남녀 배우가 등장해 “투표 ‘슥’(SG) 해야겠어요”라며 신세계 광고를 그대로 따라한 영상, 선관위 홍보모델인 탤런트 조보아가 인스타그램 필터를 더한 것 같은 화면에서 화분에 물을 주다가 “투표는 희망이다”라고 외치거나 재즈 밴드와 1분이 넘게 노래를 하다가 “투표는 표현이다”라고 외치고 끝나는, 이 장면들이 선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길이 없는 난감한 영상이 이어진다. 20대 총선 온라인 홍보대사인 에이핑크는 역시 선거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추측하기 힘든 ‘깜찍한 고백’이라는 제목의 영상 등에서 투표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힙합 뮤지션이 랩으로 투표를 독려하는 뮤직비디오 ‘레츠 보트’(Let’s Vote)라는 영상에서는 투표하지 않는 젊은층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투표를 독려한다.

‘아재 개그’가 ‘부장님 개그’보다는
재미있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몇 가지는 여전하다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점
성별이나 나이로 웃기려다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수 있다는 점
그만해야 할 때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젊은층을 어린애 취급하고
약자에 대한 혐오의 시선에
무감각한 선거 캠페인이야말로
‘심판’의 대상

이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정당이나 선관위가 정말 ‘소통’을 하고 싶은 건지 혹시 멀어지고 싶은 건 아닌지, ‘젊은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시 말이 통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나 입력한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젊은층에서 유행하는 대중문화를 부분부분 가져와서 유행의 맥락과 상관없이 흉내내기식으로 따라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우리가 이렇게 젊은이들을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애썼으니 소통한 거다”라고 일방적으로 외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트렌드의 외피만 복사해 전시하듯 보여주는 이런 캠페인이 투표 독려나 지지 호소에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당과 선관위가 젊은층을 진지한 유권자로 여기지 않고 ‘대중문화가 관심사의 전부인, 놀러갈 생각이나 하는 어린애’로 보는 시선과 태도를 드러낸다. 그래도 앞서 설명한 영상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뻔한 이야기니까.

문제는 ‘젊은층과의 소통 실패’에서 끝나지 않고 여성 차별과 비하에 이른 영상들이다. ‘요즘 대세’라는 설현이 등장하는 선관위의 광고를 보자. 광고는 각각 여성 유권자와 남성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두 가지 버전이 있다. 여성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광고에서는 설현이 화장대 앞에 앉아 “언니, 에센스 하나도 이렇게 꼼꼼하게 고르면서”라는 대사를 하고, 남성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광고에서는 설현이 침대에 누워 있거나 뒷모습을 보여주며 춤을 추다가 “오빠, 스마트폰 하나도 이렇게 퍼펙트하게 고르면서”라는 대사를 한다. 또다른 영상에서는 소개팅에 나온 남녀의 상황을 보여준다. 소개팅에 나온 여성이 “오빠, 혹시 그거 해봤어요? 오빠가 지금 생각하는 그거요”라고 말하고 남성은 “초면에 벌써부터 진도를…”이라며 여성과 입맞추는 상상을 한다. 성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그거’는 투표로 밝혀진다. 세 편의 영상은 선관위가 여성 유권자를 외모에만 관심이 있는,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서의 존재로만 여긴다고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의 한 장면으로 패러디한 거라고 설명한 소개팅 영상은 삭제됐지만 설현이 출연하는 영상은 여전히 논란의 가운데 있다.

정의당은 중식이 밴드와 총선 공식 테마송 협약식을 했다. 중식이 밴드의 곡들 중에 ‘여기 사람 있어요’ 등 세 곡을 사용하고 있다. 심상정 대표는 “중식이 밴드가 정의당과 함께하면서 정의당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청년의 정당임을 분명하게 많은 청년에게 알릴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 대표의 희망과는 다르게 중식이 밴드와의 협약 소식이 나오자 정의당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중식이 밴드는 <슈퍼스타케이7> 출연 당시 ‘빚까지 내어 성형하는 소녀들, 빚 갚으려 몸 파는 소녀들’(‘선데이 서울’), ‘넌 비싸 보이기 위해 치장을 하고 싸구려가 아니라 말한다, 난 말이 통하게 명품을 줘도 쉬운 여자 아니라 말한다’(‘좀 더 서쪽으로’) 등의 가사와 리벤지 포르노를 다룬 ‘야동을 보다가’ 등의 곡에서 여성 혐오로 논란이 된 바 있다. ‘청년의 정당’을 알리는 밴드로 여성 혐오 가사가 문제가 됐던 중식이 밴드를 선택했다는 점에 대해 실망했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정의당 지지자는 그 어떤 정당 지지자들보다 여성 등 소수자 이슈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고, 문제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그런 정의당이 중식이 밴드를 선택했다는 것은, 정의당 역시 대중문화를 선거 캠페인에 가져올 때 기본적인 맥락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주요 지지층, 특히 여성 청년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이번 선거 캠페인에서 포착된 웃지 못할 광경들은 부장님이 최신 유행어 몇 개를 연습해 팀원들을 웃기겠다는 의욕을 앞세워 웃음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입으로 소리 내어 웃을 수는 있지만 절대 눈으로는 웃을 수 없는 ‘부장님 개그’를 떠올리게 한다. 부장님 개그는 요즘 ‘아재 개그’라는 유행어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뭔가 재미있어진 것처럼 보인다. 아재 개그가 부장님 개그보다는 더 재미있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가지는 여전하다. 한두 번만 반복하면 똑같이 재미없다는 점과 듣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더 즐겁다는 점,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점, 그리고 성별이나 나이로 웃기려다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수 있다는 점, 그만해야 할 때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다. 정당과 선관위가 문제적인 선거 캠페인을 그만둬야 할 때를 모른다면, 유권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비판해야 한다. 젊은층을 어린애 취급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의 시선에 무감각한 선거 캠페인이야말로 ‘심판’의 대상이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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