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종석.
[토요판] 안인용의 미래TV전략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최근 북한의 문학예술이 침체기라고 질타하며 “‘영화 혁명의 불바람’을 세차게 일으키자”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이러한 행보를 ‘매직아이’로 뚫어져라 바라보니, 영화를 좋아했던 김정일 위원장의 얼굴에 그의 ‘베프’(베스트 프렌드)인 전직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의 얼굴이 겹쳐진다. 사진으로만 보면 합성이 분명한 김정은 위원장과 데니스 로드먼의 우정이 할리우드에서 <디플로매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질 계획이란다. 데니스 로드먼은 김정은 위원장 캐릭터와 함께 광고도 찍었다. 10월에는 김정은 위원장을 인터뷰하게 된 미국 토크쇼 진행자와 프로듀서가 시아이에이(CIA)로부터 그의 암살을 의뢰받는다는 내용의 코미디 영화 <더 인터뷰>가 개봉한다. ‘북한’이라는 소재가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뻔한 악당 역에서 영역을 넓혀 코미디 영화의 핵심 캐릭터로 우뚝 섰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김정은 위원장의 캐릭터가 가장 넓은 시장인 할리우드에서 ‘팔린다’는 얘기다. ‘영화 혁명의 불바람’은, 비록 웃음바람일지라도 저 멀리 태평양 건너에서 이미 불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할리우드에서 김정은 위원장이라는 캐릭터가 팔린다면, 한국에서는 ‘꽃미남 간첩/탈북자’가 매진을 앞두고 있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김수현부터 <동창생>의 최승현(‘빅뱅’의 탑), <용의자>의 공유로 이어진 ‘꽃미남 간첩물’이 최근 티브이로도 옮겨왔다. 에스비에스(SBS)에서 방영 중인 <닥터 이방인>(사진)의 이종석(박훈 역)이 그 주인공이다.(북에서 온 남자들이 이 정도라면, 통일은 진정 대박이다.) 박훈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북한에서 자라나 의사가 됐고, 다시 한국으로 탈출한 탈북자다. 박훈은 영화 속 꽃미남 간첩들이 그랬듯이 비극적인 분단의 역사를 빈티지 트렌치코트처럼 ‘시크’하고 ‘드라마틱’하게 걸친다. 박훈은 영화 속 그들처럼 북한의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최고의 실력자다. 북에 두고 온 가슴 아픈 첫사랑도 물론 있다.
이쯤 되면 비현실적인 설정이라며 따지는 사람들 꼭 있다.(현실적인 설정은 주인공이 지구인인 걸로 충분하다.) 300개가 넘는 채널에서 막장 드라마만 줄창 방영되는 아이피티브이 같은 현실을 살고 있는 지금, 설정에서의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리고 ‘간첩/탈북자’란 ‘순정파 조폭’이나 ‘서민을 사랑한 재벌’처럼 애쓰지 않아도 최소 16회 분량의 드라마를 확보할 수 있는 정형화된 캐릭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시점에서 따져볼 질문은 이게 아닐까 싶다. “‘꽃미남 간첩물’이 우리가 ‘북한’이라는 소재로 만들 수 있는 최선입니까?”
우리에게 ‘북한’이라는 소재는 독점 공급되는 원자재와 같다. 우리만큼 북한 이야기를 잘 만들 수 있는 이들이 전세계에 또 어디 있겠나. 게다가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할리우드 시장도 열어줬다. 물 들어올 때 힘차게 노 한번 저어보자. 먼저 우리의 장기를 십분 발휘해 북한이라는 시공간을 더 적극적으로 가져와 잘 팔리도록 포장해 볼 수 있겠다. 북한 상류층 자제들의 우정과 사랑을 담은 북한판 ‘상속자들’이나 남북에서 동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 ‘비무장소년단’, ‘데니스와 정은이’ 같은 이름의 힙합 듀오도 괜찮다. 싸이와 김정은 위원장을 구분하는 정도의 상식이 있고, 새로운 시각적 체험을 갈구하며, 동시에 ‘케이팝’과 ‘케이드라마’의 민망한 플롯 전개에 익숙한 동서양의 10대들이라면 즐길 만하겠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주목해야 하는 건 포장지보다 내용물이다. 분단, 그리고 북한은 우리가 마주한 비현실 같은 현실이다. 한쪽에서는 쉽게 간첩이 만들어지고,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는 포격이 진행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종북’이라는 이름의 몽둥이가 날뛴다. 그래서 우리는 ‘김정은’이라는 캐릭터를 보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그 무게에 짓눌려 비장한 눈빛으로 관객을 쏘아보며 이미 했던 말만 반복하는 건 의미도, 재미도 없다. 패션 아이템처럼 ‘북한’을 소비하면서도 한번쯤은 오늘을 사유하게 하는 풍자의 힘,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날카로움이 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할리우드에서도 ‘선주문’이 들어오는, ‘창조 경제’를 견인하는 우리 대중문화의 원천기술이 되지 않을까.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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