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의 세 해설위원.
[토요판] 안인용의 미래TV전략실
2014 브라질월드컵 알제리전이 끝나고 나서 뒤늦게 6월21일치 문화방송 <무한도전> 응원단 편을 보다가, 슬퍼졌다. <무한도전>뿐 아니라 <힐링캠프>나 <우리동네 예체능>의 월드컵 특집도 슬프긴 마찬가지였다. 월드컵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기에 짠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월드컵 특집이 하나같이 뻔해서 슬펐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일밤>이 ‘이경규가 간다’를 처음 선보인 이후 16년, 예능 프로그램의 월드컵과 올림픽 특집은 예능인이 직접 응원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큰 틀을 유지해왔다. 현장으로 가는 준비 과정-낯선 현장에 도착해서 겪는 좌충우돌-우리 선수들과의 짧은 만남-현장(응원석이나 중계석)에서 전달하는 응원의 함성-경기 결과에 따른 급귀국 혹은 현지 토크쇼. 이 서사의 무한반복이다. 시청률 경쟁력을 위해 예능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게스트나 큰 활약을 거둔 선수를 섭외하지만 이 역시 최근에는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 ‘노리고 나왔네’라거나 ‘반짝하고 말겠지’ 정도의 반응이다. 10여년 학습의 결과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유독 월드컵 특집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시들했고, 이 관심은 월드컵 해설진에 쏠렸다. 차범근 감독에 안정환, 송종국, 이영표, 김남일, 차두리 선수로 꾸려진 또다른 국가대표팀(괜찮은데?)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해설진의 이름은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시청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 개였다. 축구 중계의 마이스터 ‘차붐’ 부자와 배성재 캐스터의 환상 호흡이냐, 교실 맨 앞자리에서 “저요! 저요!” 할 것 같은 ‘초롱이’ 이영표의 해설이냐, 아니면 ‘아빠 브라질 가’ 팀이냐.
월드컵이 시작됐다. 초반에는 ‘아빠 브라질 가’ 팀이 치고 나갔다. 축구 경기를 2010년 월드컵 이후 처음 보는 어머님, 아버님은 매주 일요일마다 만나서 친근한 민율이와 리환이, 지아 아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일본과 코트디부아르 경기를 기점으로 예상외의 변수가 떠올랐다. 일본이 상대 골문을 향해 달려가면 나라 잃은 설움을 토해내며 속사포 랩을 쏟아내는 이영표 해설에 채널이 돌아갔고, (우리 기준으로) 월드컵이 거의 끝난 지금까지도 이영표의 우세는 계속되고 있다.
이영표의 선전도 인상적이지만, 그래도 경기도 예능도 지루해진 이번 월드컵의 엠브이피는 안정환이다. 영화배우가 축구도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월드 클래스’ 축구선수였던 반전의 사나이 안정환. 그랬던 그는 <아빠 어디 가>에서 수염과 살이 ‘잘생김’을 빼앗아 가버린 과체중의 중년 남성으로, 발로 축구를 했기 망정이지 연기를 했으면 큰일 났을 뻔한 반전의 ‘슈퍼마리오’ 예능인으로 재발견됐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번 월드컵에서 응원석이 아닌 중계석에 앉았다는 점이다. 운동장 주변을 맴돌며 응원하거나 중계석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예능인이 아닌 예능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지고 중계석에 앉아 있는 축구인은 차원이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한번 빠져들면 좀처럼 헤어나기 힘든 마성의 ‘저렴한 언어구사’와 명치에서부터 올라오는 짜증과 한숨, 그러면서도 필요할 땐 짧고 굵게 짚어주는 해설. 민율이 아빠 김성주와 투닥거릴 때는 <아빠 어디 가>의 확장판이나 다름없다. 축구를 본편으로 보고 예능을 부록으로 보는 게 아니라 축구라는 본편을 예능으로 보는 것, 이게 올해 안정환이 이끌어낸 패러다임의 변화이자 월드컵을 소비하는 패턴을 바꾼 결정적인 장면이다.
올해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에서 스포츠 중계는 예능의 문턱을 거의 다 넘었다. 방송사는 이제 돈 들여 예능인들을 비행기 태우는 대신 해설위원을 예능인으로 길러내야 한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해설과 중계가 가능한 이들은 어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캐릭터 만들기 특훈과 경기 상황에 걸맞은 적절한 ‘드립’과 ‘유행어’ 제조 트레이닝을 받아야 한다. 다음 월드컵이 4년 남았다. 2018 러시아월드컵이 열리기 6개월 전에 박지성과 베컴, 루니를 섭외해 <아빠 어디 가> ‘축구선수 아빠’ 특집을 찍고 이들을 바로 월드컵 해설위원으로 데뷔시키는 통 큰 계획도 고려해볼 만하다. 이들만 합류해준다면 세계 최초 ‘축구 해설 프로그램’ 수출도 가능하다.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먹힐 만한 기획이지 않은가. 이런 게 바로 창조경제다. 안정환, 때땡큐!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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