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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현재를 비웃는 f(x)의 미래 전략

등록 2014-07-11 18:39수정 2014-07-12 13:09

가수 f(x).
가수 f(x).
[토요판] 안인용의 미래TV전략실
다음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자. ‘눈 크게 떠 거기 충돌 직전 폭주를 멈춰 변화의 목격자가 되는 거야 밀어대던 거친 캐터필러 그 앞에 모두 침몰할 때 커졌어 Red Light 선명한 Red Light 스스로 켜져 그것은 Red Light.’(‘Red Light’ 중) ‘My MILK 데인 맘에 붓죠 맘에 붓죠 맘에 붓죠 My MILK 베인 맘을 적셔 맘을 적셔 맘을 젹셔.’(‘MILK’ 중) ‘콩닥 콩닥 콩닥 콩닥 콩닥 콩닥 무지개 Oh What’s that 무지개.’(‘무지개’ 중)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으로 발간된 시집의 한 페이지 같기도 하고, 미국의 중장비회사 캐터필러에 입사하려는 기계공학도의 이력서 같기도 하고, 중2 남학생의 트위터 멘션 같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Ctrl+C와 Ctrl+V를 실수로 여러 번 잘못 눌러 만든 것 같은 이 문장들은 걸그룹 에프엑스(f(x))의 세번째 시집, 아니 3집 수록곡 가사다.

차트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아이돌 그룹 중에 ‘미래’라는 단어와 가장 닮은 그룹을 꼽는다면 단연 에프엑스다. 에프엑스는 ‘미래적’이다. 여기에서 ‘미래’는 케이팝을 이끌어갈 유망주라는 뻔한 수식어가 아니라 따분하고 지루한 ‘현재’를 비웃으며 두 걸음 반 정도 앞서 걷고 있는 것 같다는 의미다.

이들의 첫번째 미래 전략은 위에서 이미 낭독한 바 있는 가사다. 이들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자.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한 번 놀라고, 어떤 뜻인지 몰라 두 번 놀란다는 전설의 곡 ‘NU 예삐오(ABO)’. 이 곡에는 대중음악 역사상 (아마도) 처음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꿍디순디’다. ‘독창적 별명짓기 예를 들면 꿍디순디 맘에 들어 손 번쩍 들기 정말 난 NU 예삐오.’ 가사로 생활의 지혜 ‘리빙 포인트’를 전하는 곡 ‘핫 썸머’도 있다. ‘땀 흘리는 외국인은 길을 알려주자 너무 더우면 까만 긴 옷 입자.’ 사행시도 시도한다. ‘일렉트릭 쇼크’의 한국어인 ‘전기충격’으로 지은 사행시는 다음과 같다. ‘전 전 전압을 좀 맞춰서 날 사랑해줘 기 기 기척 없이 나를 놀래키진 말아줘 충 충돌하진 말고 살짝 나를 피해줘 격 격 격변하는 세계 그 속에 날 지켜줘.’

가사의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다리 대신 너비를 가늠할 수 없는 계곡이 있어 매번 멈칫하게 된다. 주어와 술어는 작정한 듯 어긋나 있고, 한국어와 영어는 마구 뒤섞여 있으며, 의성어와 의태어는 이모티콘처럼 아무 때나 튀어나온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에프엑스의 가사는 무엇을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다. 사랑을 노래한다고 하기엔 온도가 낮고, 이별을 노래한다고 보기엔 습도가 낮다. (그럼 대체 무엇을 노래하느냐면, 음… 세계 평화?) 의도와 메시지를 지우고 시각과 청각 등 감각으로 승부한다. 이들의 가사는 노래를 구성하는 수많은 비언어적 표현 요소 중 하나에 가깝다.

이들의 미래 전략은 가사 말고도 많다. 에프엑스의 이미지는 흐릿해서 강렬하다. 동물의 탈을 쓴 사진, 레이스 천으로 눈을 가린 사진, 이번에는 <어벤져스 2> 촬영지로 알려진 문래동 철강단지를 배경으로 한쪽 눈을 가린 채 찍은 사진이 그렇다. 무대 위에서도 남다르다. ‘파격 노출’이나 ‘섹시 안무’ 같은 건 ‘흥칫뿡’이다. 섹시함은 넣어두고 새침한 소녀처럼 움직인다. 이들 무대의 백미는 “내가 웃어주니까 좋아?”라고 묻는 듯한 표정과 “오늘 좀 피곤하지만 춤은 춰주겠어”라는 식의 몸짓이다. 물론 ‘미완얼’, 미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진리도 빼놓을 수 없다.

에프엑스의 미래에 집중하다 보니 선명해지는 건 오히려 수많은 아이돌 그룹의 지루한 현재다. 모두에게 소구하려 애쓰는 대중성 대신 꾸준히 ‘꿍디순디’나 ‘캐터필러’ 같은 자기만의 블록을 쌓아 올리는 독창성이야말로 에프엑스가 지금 아이돌 신에서 빛나는 이유가 아닐까. 에프엑스가 언제까지 어떻게 활동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의 노래가 진짜 미래의 어느 날 재발견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금의 아이유가 김완선의 1990년 히트곡 ‘삐에로는 우릴 보며 웃지’를 노래하는 것처럼, 2035년쯤 그때의 젊은 친구들이 에프엑스의 노래를 들으며 “이런 가사와 이런 앨범 재킷 이미지가 그때 있었단 말이야?”라고 흥얼대는 그런 모습 말이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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