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가수 현아.
[토요판] 안인용의 미래TV전략실
티브이 프로그램에도 냄새가 있고 맛이 있다. 국물부터 제대로 낸 프로그램은 채널을 돌리며 스쳐갔다가도 그 진한 냄새 때문에 결국 돌아와 보게 된다.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유나의 거리>가 그렇다. 먹고 나면 헛헛하지만 먹을 때만은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불량식품 같은 예능 프로그램, 하루에 한끼는 꼭 챙겨 먹어야 든든한 쌀밥 같은 뉴스(라기보다 야구 하이라이트)가 있는가 하면 편의점 한편 냉장시설에 쭉 진열되어 있는 인스턴트식품 같은 프로그램도 있다. 아이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그렇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에이핑크의 쇼타임>, <비원에이포(B1A4)의 어느 멋진 날>, <방탄소년단의 아메리칸 허슬라이프>와 토크쇼 형태인 <엑소(EXO) 902014>는 모두 현재 케이블 티브이에서 방송되는 아이돌 관련 프로그램이다. 최근 종영한 프로그램으로 <제시카&크리스탈>, <현아의 프리먼스>(사진), <쇼타임-버닝 더 비스트>, <아이갓세븐>(I GOT7), <블락비의 개판 5분전>이 있으며, 곧 방송이 시작될 소녀시대의 유닛 그룹 ‘태티서’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더(THE) 태티서>도 있다. 이 외에도 아이돌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은 숱하게 많다. ‘제법 잘나간다’는 아이돌 그룹이나 대형 기획사에 소속된 신인 아이돌 그룹은 거의 다 찍는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쭉 나열하면서도 딱히 뭐 하나 끌리는 게 없다. 이걸 먹든 저걸 먹든 어차피 맛없을 게 뻔한데 그중에 그나마 나은 걸 고르자니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는, 편의점 인스턴트식품 진열대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아이돌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입덕’(‘덕후에 입문한다’의 줄임말로 팬이 된다는 뜻)의 관문이던 시절이 있었다. 기껏해서 4~5년 전의 일이다. <투애니원 티브이>(2NE1 TV)의 투애니원이 그랬고, <와일드 버니>의 투피엠(2PM)과 <인피니트! 당신은 나의 오빠>의 인피니트가 그랬다. 아이돌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뭘 하든 신선하기도 했지만, 이들 프로그램이 성공한 데에는 충분한 고민과 과감한 기획, 또 세심한 편집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아이돌 리얼리티 프로그램에는 ‘그게’ 없다. (절대 쓰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큰맘 먹고 쓰는 바로 그 단어!) ‘영혼’이랄까.
아이돌 프로그램은 크게 ‘리얼리티형’과 ‘버라이어티형’으로 나눌 수 있다. 관찰 카메라를 주로 사용하는 ‘리얼리티형’은 몇 가지 장면만으로도 방송 몇 회를 뽑아낸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녹음실 장면, 무대 뒤에 숨겨진 노력을 보여줘야 하는 새벽의 안무연습실 장면, 완벽하게 연출된 ‘예쁨 및 잘생김’과 동시에 멤버들의 ‘사이좋음’을 증명하기 위한 촬영 현장, 트렌드에 대한 감각을 보여주는 쇼핑 장면, 털털함을 뽐내기 위한 먹방, 민낯을 보여주기 위한 세안 및 숙소 장면 등이다.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 등 스태프를 챙기는 모습, 또 진심을 드러내며 눈물짓는 모습도 필수다.
비슷한 장면이 무한반복되는 것은 미션을 하면서 아이돌 멤버의 캐릭터를 보여주겠다는 ‘버라이어티형’도 마찬가지다. 무리수에 가까운 설정을 통해 ‘잘생긴 허당’이나 ‘개인기가 돋보이는 재간둥이’ 같은 뻔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 온 힘을 쏟는다. 개그맨 등 진행자가 있는 경우는 정리라도 되지만, 아이돌 그룹 멤버들끼리만 진행하는 경우에는 티브이 안에 있는 출연자들과 자막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빵 터지는데 티브이 밖 시청자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하다가 민망해지곤 한다.
기획상품에 가까운 아이돌 그룹의 콘텐츠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어떤 포장지로 싸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엇비슷한 패턴과 색깔이 뻔한 포장지를 마르고 닳도록 쓰면 시선도 끌지 못하고 팔리지도 않는다. 대중은 파파라치 사진을 통해 포장지를 벗긴 날것에 가까운 아이돌 그룹의 모습을 비록 몇 장면이지만 훔쳐보고 있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에 대한 판단과 별개로 앞으로 더 노골적인 사진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진짜 ‘리얼리티’가 펼쳐지는 사진이 있는데 누가 봐도 연출된 ‘리얼리티’는 점점 더 심심해 보일 수밖에.
‘케이’(K) 시리즈의 원조집인 ‘케이팝’은 창조경제의 근간인데, 심심한 프로그램을 반복재생해 위기를 자초할 수는 없다. 아이돌 그룹 기획사 사장들과 케이블 티브이 방송국 담당자들이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아이돌 그룹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을 해야 할 때다. 고민 끝에 답이 없다면 이제 결단을 내리자.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리얼리티 프로그램, 해체!”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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