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안인용의 미래TV전략실
보편적인 ‘케이(K)드라마’의 세 가지 주재료는 사랑과 돈, 그리고 복수다. 드라마의 목표는 하나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사랑. 사랑이면 뭐든 용서되고, 이해된다. 그리고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이뤄주기 위해 온 우주가 힘을 모아 대단한 우연을 만들어낸다. 사랑을 결혼이라는 가시적 성과로 만드는 과정은 돈이 지배한다. 주인공들은 돈으로 매겨진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느라 바쁘다. 또 복수가 생활화되어 있다. 주인공이든 주변 인물이든 지겹게도 복수를 다짐한다. 뭐 재료는 같을 수 있다. 그런데 요리법마저 엇비슷하다. 팔팔 끓이거나 기름에 달달 볶거나 튀기는 게 전부다. 맛을 낼 줄 모르니 양념만 많이 주문해 결국 음식은 짜고 매워지기만 한다.
지금의 ‘케이드라마’를 만든 건 바로 이 보편적인 공중파의 드라마 요리법이다. 온갖 사랑 이야기와 갈등을 극대화하는 장치들, 그리고 여러 상품 및 수출계약과 연계된 톱스타 캐스팅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방식은 시스템이 됐고, 지금은 1년 365일 돌아가며 수많은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올해 초 방영된 <별에서 온 그대> 이후로 요즘 ‘공중파’ 골목에는 손님이 뜸하다. 늘 오는 단골손님들은 여전하고, 간혹 손님이 꽤 있는 드라마도 있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손님들이 대부분이라서인지 화제가 되지는 않는다. 황당해서 화제가 되는 드라마는 있어도 괜찮아서 화제가 되는 드라마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요즘은 ‘케이블’ 골목이 북적인다. “이번주 <미생> 봤어?” “<나쁜 녀석들>(사진) 재밌는데, 혹시 봐요?” “<유나의 거리> 마지막회 봤어요?” 식당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에스엔에스(SNS)에서,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사랑, 좋지. 그렇지만 사랑은 인생이라는 사계절을 두고 보면 봄방학과도 같은 참 좋았던 한때일 뿐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면 부럽다)는 우리 인생에서 사랑보다 중요한 건 살아남기다. 티브이엔(tvN) 드라마 <미생>은 살아남기와 버티기, 그리고 함께 걸어가기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게임 같은 우리에게 남녀의 불타는 사랑보다 더 와닿는 것은 함께 터벅터벅 걸어가는 동료와의 진한 동료애다. <미생>은 바로 그 동료애를 세심하게 그려낸다. <밀회>에서 <유나의 거리>로 이어진 올해 제이티비시(JTBC)의 월요일과 화요일 밤은 돈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주고받은 시간이었다. 작가와 연출자의 고민과 생각이 깊고 진하게 우러난 두 편의 드라마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즐기기에 충분했다. 오시엔(OCN) 드라마인 <나쁜 녀석들>은 과격한 요리법을 선택했다. 복수라는 요리를 차갑게 식혀서 먹을 줄 아는 형사, 스스로를 의심하는 사이코패스, 마음만은 소녀인 근육질 조폭, 로맨티시스트 살인청부업자. 험악한 아저씨들 넷이 더 나쁜 놈들을 잡으러 다니는 <나쁜 녀석들>은 드라마에서 좀처럼 시도하기 힘든 장르와 소재를 거침없이 다룬다.
이들 드라마는 ‘케이드라마’의 재료나 요리법에서 자유롭다. 사랑도 있지만 그 대상과 폭이 넓고 다양하며, 돈도 있지만 돈에 휘둘리지 않고 돈을 관찰하고, 복수는 뜨겁지 않고 차갑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확실하다. 이게 과연 케이블 드라마이기 때문에 가능한 걸까. 케이블 드라마는 지상파 드라마에 비해 소재와 표현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시청률에서 조금 더 자유롭다고 한다. 그렇기에 검증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고도 한다. 케이블 채널이 이런 장점을 가진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장점을 십분 활용하는 건 아니다. 케이블 드라마 중에서도 지상파 드라마의 문법은 그대로 따온 다음 소소한 설정이나 표현에만 집중하는 드라마는 별다른 소득 없이 사라진다. 다시 말해, 호평받는 케이블 드라마는 케이블의 장점을 잘 활용하기도 했지만, 시스템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해서 얻어낸 결과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지상파 드라마는 채널의 특성상 수많은 제약사항이 있지만 ‘지상파 드라마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어놓은 수많은 한계선을 스스로 벗어나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드라마가 많아진다면 지금의 시스템은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그리고 되어야 한다. 손님은 없는데 똑같은 맛의 드라마를 찍어내는 기계만 외롭게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이 될 순 없지 않은가.
안인용 티브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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