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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열 대사보다 나은 몸짓 하나

등록 2014-12-05 19:05수정 2014-12-06 10:45

[토요판] 안인용의 미래TV전략실
어떤 캐릭터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또 그 캐릭터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몰입하게 하려면, 연기자의 눈빛이나 표정, 목소리, 말투, 의상 등 수없이 많은 요소가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그중에 ‘몸’이 있다. 몸매가 아니라 팔과 다리, 어깨와 등 같은 근육과 뼈로 작동하는 실제 몸 말이다.

몸을 쓰는 것이 연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티브이에서 몸을 잘 쓰는 연기자를, 특히 여자 연기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은 하이힐에 몸매를 드러내는 옷을 입고 대부분 가만히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잠시 걷다가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서 어딘가로 이동한다. 카메라와 마주할 때는 ‘수많은 스태프가 나를 보고 있다’를 의식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경직된 채 카메라의 각도에 따라 얼굴을 조금씩 움직인다. 털털한 성격의 캐릭터를 맡으면 ‘나 매우 털털함’을 대놓고 보여주는, 팔과 다리를 뻣뻣하게 큰 각도로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식의 진부한 몸짓을 반복한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드라마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심각하게. <에스비에스> 드라마 <미녀의 탄생>이 그렇다. 유도인 출신의 평범한 아줌마 사금란(하재숙)이 전신 성형을 통해 미녀 사라(한예슬)가 된다는 설정이다. 미녀가 된 사라는 사금란 시절의 유도 기술을 여전히 기억하고 가끔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쓴다. 앙상한 팔을 가진 한예슬이 허술한 업어치기 기술을 쓰면 사람들이 맥없이 나가떨어지는데, 이런 장면은 모두가 눈 뜨고 속아주는 엉성한 연극 같다. <오시엔>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서 유일한 여자 주인공임에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유미영(강예원) 경감의 경우도 그렇다. 그가 등장하면 해당 장면의 공기가 갑자기 멈춰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대사 전달력 문제가 제일 크지만 차렷 자세와 열중쉬어 자세 두 가지로 모든 장면을 연기하는 그의 뻣뻣함도 한몫한다.

여기 매우 주목할 만한 캐릭터가 나타났다. <티브이엔> 드라마 <일리 있는 사랑>의 김일리(이시영)다. 이제 겨우 2회분 방송이 나갔지만 그 2회에서 김일리 역을 맡은 이시영은 기억할 만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여고생 김일리는 생물 선생님 장희태(엄태웅)에 대한 짝사랑을 시작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오타쿠급의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일리는 선생님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발 빠르게 따라다닌다. 이 드라마에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이시영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고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여고생의 몸짓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선생님에게 기습 뽀뽀를 하고 휙 돌아 뛰어가는 아주 짧은 몸짓에서는 부끄러움과 기쁨, 그리고 성취감 등 복잡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이시영의 몸짓은 이 드라마 전체에 생기와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연기를 하지 않을 때는 아마추어 복싱 선수로 활약하는 이시영이기에 유독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권투 글러브를 낀 채 수없이 반복했을 발동작과 팔동작이 카메라 앞에서 이시영을 더 편안하게 움직이게 하는 건 아닐까. 다음주 월요일에 방영되는 3회부터는 페인트공 김일리가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시영은 페인트공을 어떤 몸짓으로 표현할지 궁금하다.

김일리라는 캐릭터와 이시영이라는 배우를 보다가 <일리 있는 사랑>의 연출자인 한지승 감독의 전작 <연애시대>가 떠올랐다. 드라마가 방영된 지 9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연애시대>의 어떤 장면은 잊혀지지 않고 자주 떠오른다. 여주인공이었던 손예진이 나오는 장면들이 특히 그렇다. 수영 강사인 유은호 역을 맡은 손예진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장면부터 피트니스센터에서 일하는 장면까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체육 전공자 특유의 투박한 움직임을 잘 그려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꾹 눌러놓는 유은호의 성격 역시 그의 몸짓으로 읽을 수 있었다.

유독 몸을 잘 쓰는 캐릭터와 배우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같은 연출자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연출자의 역할을 생각해보게 된다. 연기자 자신의 노력과 타고난 재능도 물론 중요하지만 연기자를 세워둘 것인지 아니면 움직이게 할 것인지, 움직이는 척하게 할 것인지 진짜 움직이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건 결국 연출자다. 이 땅의 연출자들이여, 집에 액자 하나씩 걸어두자. ‘기막힌 몸짓 하나가 열 대사보다 낫다’고.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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