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안인용의 미래TV전략실
2015년 예능 프로그램의 ‘오늘’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만한 장면이 탄생했다. 지난 3월28일치 문화방송(MBC) <무한도전> ‘식스맨 특집’에 홍진경이 남장을 하고 나타난 장면이다. 이 장면은 먼저 새로운 시각적 자극이라는 면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봐온 남장은 주로 사극에서 여자 주인공이 비극적 운명을 피하기 위해 갓을 쓰고 다니는 정도의 다소곳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홍진경은 전날 과음으로 인해 면도를 하지 못하고 출근한 아저씨 느낌이 물씬 풍기는 수염을 붙이고 정장에 넥타이까지 하고 나왔다. 다음으로 이 장면을 주목해야 하는 건 홍진경이 남장을 하고 나온 이유 때문이다. “댓글을 보니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이 많더라. 그래서 남장했다”는, 웃기면서도 슬픈, 기발하면서도 후줄근한 홍진경의 모습은 지금 예능 프로그램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 3월26일치 제이티비시(JTBC) <썰전>은 ‘예능심판자’ 코너에서 ‘사라진 예능의 딸들 나 좀 찾아줘’라는 주제를 다뤘다. 이 코너에 따르면 예능 프로그램 시청률 10위권 프로그램 중에 여성 출연자가 고정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은 송지효가 출연하는 에스비에스 <런닝맨> 하나에 불과하다. 이어 <썰전>은 이에 관한 연출자들의 의견을 소개했다. “주시청층이 여성이라서 남성을 쓸 수밖에 없다” “여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남성이 많아졌다” “남성은 망가지는 상황도 코믹하게 표현하지만 여성은 방어적이다. 신체, 프라이버시 노출이 어려워 제약이 있다” “남자들이 경험이나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편하다. 남자만의 의리가 팀워크, 케미(화학반응처럼 강하게 끌림)로 발산된다” “여성 출연자에게는 뭘 하라고 요구하기가 불편하다” 등의 의견이 있었다.
<무한도전>은 여섯 번째 멤버를 찾는 식스맨 특집을 진행하면서 1차로 21명의 후보군을 추렸다. 홍진경(사진)은 그중에 유일한 여성이다. 그나마도 유재석이 웃자고 던진, “(홍진경을 추천한 사람이) 한 명”이라는 말처럼 홍진경은 사실상 후보 목록에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한도전>의 여섯 번째 멤버, 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남성을 떠올리게 된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무한도전>은 남자고등학교의 한 반을 옮겨놓은 것처럼 장난치며 떠들고 뛰어다니는, 요즘 대세인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원조 격이 아닌가. <썰전>에서 소개된 연출자들의 의견 중 몇몇은 시청자들이 <무한도전>의 새로운 멤버로 ‘여자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로 바꿔도 썩 들어맞는다. 물론 이 의견들이 전부 ‘여자라서 안 되는’ 이유로 타당하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의견들 중 몇몇은 여성 예능인에 대한 (아마도 경험에 근거했을) 성차별적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무한도전>처럼 몸도 마음도 탈탈 털며 웃음을 뽑아내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소화할 만한 여성 예능인의 이름을 대보라고 한다면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은, 없다.
상황이 이러한데 <무한도전> 제작진은 홍진경을 애써 발굴(!)해 식스맨 후보로 등장시켰다. 이는 “역시 <무한도전>”이라는, 닳고 닳은 감탄사를 다시 한번 내뱉게 한다. 홍진경이 실제 여섯 번째 멤버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사라진 ‘예능의 딸’이 남장을 하고 등장해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를 줬고, 또 “여성 멤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해보게 했으니 말이다. 홍진경의 예는 ‘예능의 딸’들이 사라진 지금의 예능 프로그램이 여성 예능인을 활용하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홍진경은 시청자가 기대한 후보군에서 완전히 벗어난 카드였지만, 그 의외성이 오히려 식스맨 특집의 폭을 넓혔다. 단지 여성 예능인의 출연 빈도가 높아져서, 가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유지해야만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특집이든, 단발성 출연이든, 스핀오프(기존 작품의 인물 등으로 새로 파생된 작품) 식의 기획이든 어디에든 여성 예능인을 투입해보는 작은 시도라도 소중한 2015년이다. 뭐라도 해보자. 여성 예능인도, 제작진도 ‘뭐라도 하다 보면’ 또 새로운 트렌드가 생겨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재미도 생겨나지 않겠나. ‘홍진경의 남장 정신’을 잊지 말자.
안인용 티브이칼럼니스트
홍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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