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과 디자이너 가구 이미지로 가득 찬 빅뱅 탑(T.O.P) 인스타그램의 갈무리.
[토요판] 안인용의 미래TV전략실
21세기 연예인들은 두 가지 활동을 한다. 하나는 티브이나 영화 등의 채널을 통해 연예인으로서 보여지는 공식 활동이고, 또 하나는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사생활을 중계하는 비공식 활동이다.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는 공식 활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지만, 그 인기를 꾸준히 끌고 가는 건 비공식 활동이다. 누구를 만나 뭘 먹고 어딜 가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보여줘야 대중과 가까운 곳에서 계속 주목받을 수 있다. 요즘 대세는 사진을 주제로 한 소셜네트워크 ‘인스타그램’이다.
인스타그램은 특히 팬덤이 강한 아이돌 그룹 멤버들에게 꽤 유용하다. 무대 위에서 길어야 4분, 그것도 멤버가 많으면 30초도 잡히기 힘든 이들에게 인스타그램은 팬들에게 진짜(이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나 취향을 보여주고, 각양각색 셀카로 팬들을 ‘조련’도 하면서 인기를 이어가기에 딱 좋다. 게다가 잘만 올리면 순식간에 30개가 넘는 기사가 뚝딱 만들어지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도 한 20분 정도 올라갈 수 있다. 단점도 있다. 이미지가 금세 바닥난다는 거다. 처음엔 어떤 사진을 올려도 신선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애완동물-음식-패션 아이템-여행-운동-화보 B컷-알파벳이 써 있는 그럴듯한 짤방 등을 반복해서 올리는 뻔한 패턴에 접어들게 된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아이돌 인스타그램이 지루해지고 있는 요즘,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다. 한 달 전부터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빅뱅의 탑(T.O.P)이다.
탑의 인스타그램은 ‘예술예술’하다. 올리는 사진의 절반은 다른 연예인들과 다를 것 없는 셀카와 화보 사진, 음식 사진이지만 나머지 절반이 남다르다. 국내외 현대미술 작품 사진과 디자이너 가구 사진이다.(로스코 전시에 다녀와서 올리는 인증샷은 아니다. 감사합니다!) 팬들의 기대와는 제법 어긋나는 이런 사진들을 통해 탑은 가구와 예술 작품 컬렉터로서 자신의 관심사와 취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인스타그램 방문자들은 (그의 셀카만큼 이 사진들에 관심이 있어 보이진 않지만)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단다. “이게 뭐예요?” 같은 반응도 있지만 대체로 “와우!”, “아티스트 탑!” 등의 감탄사를 올리거나 “저도 이 작가 좋아해요”라며 작가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드러낸다.
탑의 인스타그램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짚어볼 만하다. 한 가지는 탑이 이 사진들을 통해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팬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점이다. 호응하는 팬들 중에 탑이 올린 작품들을 검색하다가 작가들에게 관심을 갖고 미술관을 찾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고, 탑의 생일에 그가 좋아하는 디자이너 가구나 예술 작품을 구입해 선물하는 일도 머지않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신승훈의 팬들 중에는 공연을 따라다니다가 공연기획자가 된 이들이 있고, 신화의 팬들 중에는 방송사 피디나 작가, 기자로 활동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10~20대 팬들 중에 탑에게 영향을 받아 디자이너나 예술 관련 종사자가 되는 경우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탑이 인터뷰에서 “젊은 사람들끼리 문화적으로 공유하다 보면 저희 나이 또래나 20대 분들에게 좋은 영향이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이렇게 자신의 영향력을 새로운 영역에서 시험하고 있다.
탑의 인스타그램에서 짚어볼 만한 다른 한 가지는 연예인으로서, 또 아이돌 가수로서의 차별화 전략이다. 그가 자신이 소비되길 원하는 이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예술을 잘 알고, 즐기고, 시도하고, 또 사는 사람. 탑은 실제 큐레이터로서의 역할에도 도전하고 있다. 20대 아이돌 그룹 멤버가 이런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적극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다.(자기가 직접 페인팅을 하고 전시회를 여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건 오히려 마이너스일 때가 더 많다.) 빅뱅의 지드래곤과 투애니원의 씨엘이 패션에 있어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한 것처럼, 탑은 미술과 가구라는 영역에서 자신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다.
아이돌 가수들이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면 이제 자기만의 키워드를 찾아낼 때다. 패션이나 디제잉, 피규어 수집, 동물 보호는 이미 너무 많다. 따라쟁이가 아닌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 클래식 음악이나 에스에프소설 같은 경계가 확실한 장르나 독립출판 또는 실험영화 같은 ‘인디인디’한 취향도 괜찮겠다. 페미니스트나 다문화가정 같은 키워드는 당장 리스크는 있지만 길게 보면 충분히 경쟁력 있다. 어서들 고르시라.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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