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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육룡이 나르샤’ 연희 성폭행 장면이 꼭 필요했다고?

등록 2015-10-16 20:15수정 2015-10-23 15:11

1990년대 드라마나 조폭 영화에서나 쓰일 법한 클리셰가 2010년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등장할 줄이야. 진부할뿐더러 젠더 감수성도 따르지 못했다. 에스비에스 제공
1990년대 드라마나 조폭 영화에서나 쓰일 법한 클리셰가 2010년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등장할 줄이야. 진부할뿐더러 젠더 감수성도 따르지 못했다. 에스비에스 제공
[토요판] 안인용의 ‘좋아요’가 싫어요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주인공 ㄱ은 어느날 우연히 음모에 휘말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 눈물을 삼키며 복수를 다짐한 ㄱ은 그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간 이와 세상을 향해 복수를 시작한다.’

세상은 넓고 이야기는 많다. 하루에도 수십개의 이야기가 영화, 드라마, 웹툰으로 쏟아져 나오지만 수많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적어도 30% 정도의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30%는 자신도 몰랐던 비범한 능력을 발견해 복수하는 이야기, 또 30%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돈과 권력으로 복수하는 이야기, 나머지 10%는 복수하려다가 스스로 거대한 악이 되고 또다시 음모에 휘말리면서 소중한 사람을 잃고 복수를 다짐하(면서 쳇바퀴만 빙빙 돌다가 선과 악의 경계가 없음을 보여주고 끝나)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구체적인 이유나 복수의 방식은 제각기 달라도 어쨌든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이 사건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의 등을 떠미는 이는 물론 창작자다. 창작자는 어떻게 하면 주인공이 그럴듯한 이유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하게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아예 주지 않거나 빼앗는다. 그래야 주인공이 ‘각성’하고 제 발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사건을 통과할 수 있다. 문제는 ‘각성제’의 성분이다. 주인공이 스스로 각성의 이유를 찾고 자기를 설득하는 경우에는 별다른 부작용 없이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간다. 그러나 각성 자체를 목표로 주변 인물을 희생양으로 소비하고 이를 단순한 분노와 막연한 다짐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경우에는 금세 약발이 떨어진다. 지난 화요일에 방송된 에스비에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이하 <육룡>)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육룡’에 버젓이 등장한 클리셰
시청자들의 불쾌감만 초래

“스토리상 필요” 강변하지만
윤리와 시대감각만 의심스러워

젠더 감수성은 필수적인 필터
시대의 흐름 올바로 읽어야

시대 배경은 고려말, 심성은 착하지만 겁이 많은 땅새는 같은 마을의 연희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던 둘은 들꽃이 가득한 언덕에서 마음을 확인한다. 전쟁을 핑계로 백성의 땅 장사를 하던 권문세족은 땅새의 마을까지도 흔들어놓고, 권문세족의 가노들은 마을에 와서 패악질을 하며 연희를 성폭행한다. 그 장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땅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목숨을 끊으려 하지만 훗날 스승이 되는 이가 땅새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삼한제일검’이 되어 돌아온 땅새는 복수를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지난 화요일에 방영된 내용이다. ‘땅새의 각성’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이 내용에 대해 많은 시청자들이 불쾌함을 표시했다. 불쾌감을 표시한 부분은 물론 연희의 성폭행 부분이다. 이에 대해 드라마의 관계자는 <뉴스엔>에 “땅새의 각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장면이었다”며 “일부러 자극적인 설정을 한 것은 아니고 스토리상 필요했다”고 해명했다.

이 해명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육룡>은 <대장금>부터 <선덕여왕>, <뿌리깊은 나무>까지 매번 ‘최고’라는 찬사를 들었던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쓰는 드라마다. 연출자인 신경수 피디도 <뿌리깊은 나무>를 함께했다. 그 누구보다도 현대적인 시각으로 사극이라는 장르를 흥미롭게 만들어온 이들이 인물의 각성을 위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첫사랑인 여자가 내 눈앞에서 짓밟히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라는 설정을 선택했다는 건 의아하기까지 하다. 1990년대 드라마나 조폭 영화에서나 쓰는 클리셰가 <육룡>에 등장할 줄이야. 진부한 설정이라도 표현 방법에 따라 전달되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이 장면은 표현 방법마저 지나치게 진부하다. 연희가 성폭행당하는 곳은 둘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들꽃 언덕과 같은 장소다. 순수한 고백과 잔인한 폭력이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다. 땅새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이 자기 합리화와 자기 비하 사이를 오가며 눈물 콧물을 쏟아내다가 드디어 ‘각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한다. 연희가 성폭행을 당했기에 땅새는 죄책감과 한, 그리고 독기를 품을 수 있었고 결국 최고의 검객이 될 수 있었다. 성폭행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성인이 된 땅새가 처음 등장해 복수를 시작하려는 순간 회상으로 연희가 성폭행당하는 장면이 다시 한번 재생된다. 성인 땅새를 연기하는 배우 변요한의 진지한 눈빛 연기에도 불구하고 땅새의 각성제는 영 신통치 않다. 땅새라는 캐릭터뿐만 아니라 드라마 전체에 대한 몰입도와 신뢰는 수직 하강한다. 이쯤 되면 창작자의 게으름을 의심하게 된다. 여성 캐릭터 성폭행이라는 설정이 최선이었을까?

이 장면에 등장하는 땅새와 연희는 현대물로 치면 중학생쯤 됐을 법한 나이다. 실제 연기를 하는 아역 배우들도 중학생이다. 연희를 성폭행하는 가노들이 연희와 처음 길거리에서 만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가노로 나오는 성인 남성들은 연희의 얼굴을 쓰다듬고 몸을 구경하면서 “아주 벌써부터 색기가 그냥”이라며 낄낄댄다. 이 대사는 미성년자 여성에 대한 성인 남성의 성희롱이라는 걸 명백하게 드러낸다. 이 장면은 성폭행에 대한 암시 말고는 그 어떤 구실도 하지 않는다. 줄거리나 주요 갈등과도 무관하다. 다음날, 연희를 희롱한 바로 그 가노들이 연희를 성폭행하는 장면에서는 두명의 성인 남자들이 “내가 먼저야”라고 하며 연희를 들판에 쓰러뜨린다. 바닥에 엎드린 채 쓰러진 연희는 에코 효과가 들어간 비명 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끌려가 화면에서 사라진다. 바로 다음 장면은 온몸과 얼굴이 흙투성이가 된 연희가 꽃분홍색 옷을 바닥에 질질 끌고 어두워진 들판을 걸어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시선과 온갖 효과, 장면 연출에서 폭력을 읽어내지 않을 방법이 없다. 고려 말의 혼란과 권문세족의 악행을 보여주고자 한 거라고 우길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억지다. 시대상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성희롱이나 성폭력이 오직 연희에게만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효과나 암시 같은 이상야릇한 장면들은 다 빼고 피해자의 시선에서 정직하게 폭력을 그려냈어야 했다. 이 정도면 창작자의 윤리를 의심하게 된다. 이 모든 장면들이 정말 문제없다고 생각한 걸까?

마지막 의심은 시대감각에 대한 의심이다. 창작자라면, 더욱이나 <육룡>의 작가들처럼 사극이든 현대극이든 그들이 쓰는 작품 속 세상이 작품 밖 세상과 어떤 식으로든 소통하길 기대하는 창작자라면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젠더 이슈가 어떤 흐름인지, 무엇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인지해야 한다. 미디어에서 여성을 다루는 내용과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면서 동시에 또렷해지고 있다. 젠더 감수성은 지금의 창작자들에게 인스타그램의 어떤 빈티지 필터들보다도 필수로 장착해야 할 필터다. 2015년의 콘텐츠 소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성차별을 포함한 차별 문제, 인권 문제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직설적으로 의견을 피력한다. 남성 잡지 <맥심>과 리뷰 애플리케이션 ‘왓챠’, 치킨 브랜드 ‘케이에프시’, 교복 브랜드 ‘스쿨룩스’ 등은 최근 여성 혐오 콘텐츠와 성차별적 콘텐츠 등으로 인해 사과와 함께 해당 콘텐츠 수거와 철거를 진행해야 했다. <육룡>의 이번 미성년자 성폭행 장면에 대해서도 방송과 동시에 에스엔에스(SNS)와 게시판들을 중심으로 문제 제기가 이뤄졌다. 젠더 감수성은 ‘있으면 좋은’ 옵션이 아니라 ‘있어야 하는’ 필수다.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자들, 이에 대한 의사결정자들, 또 실무자들까지 이를 체크할 수 있는 복수의 관문이 존재해야 하며, 문제가 될 만한 것에 대해서 바로바로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콘텐츠 소비자들, 관람객들, 시청자들과 같은 시대감각을 갖지 못한다면 작게는 창작의 범위가, 크게는 설 땅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이제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설정,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 ‘새로움’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나 엉뚱하고 재기발랄한 표현이나 유행어에서 오는 게 아니다. 의심에서 온다. 지금까지 문제없이 써온 수많은 설정과 표현, 단지 익숙하고 편해서 고집하는 시선과 감각을 의심해보자. 작은 의심들이 쌓이면서 그에 따른 합리적인 사고가 뒤따르고, 그게 설정과 인물을 선택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면 같은 소재라고 해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까.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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