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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응답하라’가 성공한 드라마일까?

등록 2015-11-13 20:12수정 2015-11-14 10:05

<응답하라> 시리즈는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특유의 유머와 감동 코드로 시청자를 움직이지만, 그 안의 이야기는 안전을 고집하면서 보수적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공회전한다. 지난 6일 첫 방송을 시작한 <응답하라 1988>의 공식 포스터.
<응답하라> 시리즈는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특유의 유머와 감동 코드로 시청자를 움직이지만, 그 안의 이야기는 안전을 고집하면서 보수적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공회전한다. 지난 6일 첫 방송을 시작한 <응답하라 1988>의 공식 포스터.
[토요판] 안인용의 ‘좋아요’가 싫어요
‘내 끝사랑은 가족입니다.’

쌍문동 골목길에 다섯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진 위에 이렇게 쓰여 있다. 지난 6일 첫 방송을 시작한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공식 포스터 이미지다. 부산을 무대로 한 <응답하라 1997>(이하 <응칠>)의 공식 포스터에는 에이치오티(H.O.T)의 히트곡 ‘캔디’의 모자와 장갑을 낀 주인공 성시원(정은지)이 “열여덟, 오빠들은 내 삶의 전부였다”라는 문구와 함께 웃고 있었고, 서울 신촌을 배경으로 한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의 포스터에는 ‘촌놈들의 전성시대’라는 문구 위에 ‘신촌하숙’의 친구들 일곱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응칠>과 <응사>의 연이은 성공으로 케이블 드라마의 대표적인 성공작이자 1990년대 재조명 열풍을 이끌어낸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응답하라> 시리즈가 선택한 <응팔>의 키워드는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이 ‘가족’이다.

가족은 우정, 첫사랑과 함께 <응답하라> 시리즈가 일관성 있게 밀고 가는 주제다. <응칠>과 <응사>에서도 가족은 드라마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시리즈 내내 여주인공의 부모를 연기하는 성동일과 이일화는 매회 빠짐없이 등장하며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일깨워주었고, 시리즈에서 적어도 한 번은 주인공들의 가족사가 언급됐다. 그래도 <응칠>은 학교가, <응사>는 하숙집이 주무대였기에 고등학생, 대학생인 주인공들의 우정과 사랑을 둘러싼 갈등이 극을 이끌었다. <응팔>은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봉황당 골목’을 주무대로 내세운다. 이 골목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는 다섯 가족의 이야기로 초점을 맞추고 가족들 각각의 내밀한 갈등을 비롯해 아빠들, 엄마들, 그리고 아이들의 관계를 전면에 배치한다.

‘응답하라’는 분명 성공한 시리즈다
형식은 독창적이고
특유의 유머와 감동의 코드로
시청자를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전진하지 않고
안전을 고집하며…
인물들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가족’을 선택한 <응팔>은 전작들에 비해 드라마의 온도가 올라갔다. <응답하라> 제작진의 특기는 감동 코드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따뜻한 속내가 숨겨진 이야기를 슬쩍 보여주며 눈물을 훔치게 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감동 코드가 가장 잘 작동하는 이야기는 물론 가족 이야기다. <응칠>에서는 졸업식날 부모가 없는 윤윤제(서인국)에게 자기 부모를 빌려주는 성시원(정은지)의 이야기나, 남편이 암 선고를 받자 드라마 등장인물을 암으로 죽이지 말라는 엄마의 이야기 등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응사>에서는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삼천포(김성균)와 조윤진(도희)의 고속터미널 장면이나 해태(손호준)의 엄마가 잼을 만들어 보내는 장면 등이 호평을 받았다. <응팔>은 시작부터 말없는 아들 정환(류준일)과 대화를 시도하는 이야기, 성덕선(혜리) 할머니의 장례식 이야기, 맛없는 엄마의 도시락을 웃으며 먹는 선우(고경표)의 이야기 등 <응답하라> 시리즈 특유의 감동 코드를 곳곳에 배치했다.

‘가족’으로 인해 드라마의 온도는 올라갔지만, 동시에 이 시리즈의 단점은 더 명확해졌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로맨스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판타지물이다. 가족 판타지, 중산층 판타지랄까.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여자 주인공을 사랑하는 인물들은 모두 ‘아친아’, 그러니까 아빠 친구의 아들이다. 아빠 친구의 아들일 뿐인데 그들은 모두 대단히 똑똑하고 인물도 좋으며 여자 주인공을 무작정 사랑한다. <응칠>에서 아빠 친구의 첫째 아들 윤태웅(송종호)은 안철수에 버금가는 인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둘째 아들 윤제는 일찌감치 사법시험에 합격해 ‘스타 판사’가 된다. 형제인 둘은 성시원을 동시에 사랑한다. <응사>에서는 아빠 친구의 둘째 아들인 쓰레기(정우)가 수석을 놓친 적 없는 천재 의대생이다. 게다가 하숙집에서 우연히 알게 된 칠봉이(유연석)는 메이저리그를 씹어먹는 국보급 투수이고, 역시 주인공 성나정(고아라)을 짝사랑한다. 칠봉이는 심지어 결혼한 성나정과 쓰레기 부부에게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상암동의 아파트를 빌려준다. <응팔>에서는 아빠 친구 아들인 정환이가 축구에 열광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지만 알고 보면 1등인 수재로, 윤제와 쓰레기의 뒤를 이을 인물로 그려진다. 또 다른 동갑내기 친구인 선우 역시 전교회장이고, 택(박보검)은 바둑 세계 랭킹 1위인 바둑천재다. <응칠>과 <응사>에서 여자 주인공은 각각 판사, 의사와 결혼한다. ‘사’자 직업을 가진 아빠 친구의 아들과 결혼하는 것만큼 현실적이고 안전한 판타지가 또 있을까.

<응답하라> 시리즈는 시리즈 내내 남편을 찾다가 결국 마지막에 남편이 누군지 공개하며 막을 내린다. <응팔>도 첫 회부터 남편 찾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여자 주인공 성덕선은 네 명의 동갑내기 친구들 중 한 명과, 유력하게 아빠 친구 아들과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앞으로 <응팔>은 어린 시절부터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자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사람과 어떻게 사랑에 빠지며 결혼에 이르게 되는지 그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릴 것이다. 지금까지 늘 그랬던 대로 말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사랑 이야기는 구식 연애담이나 여성 시청자를 위한 판타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들여다보면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 모든 관계를 완결해버리는, 말하자면 가족 판타지다. 주인공들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의 유사 가족이나 대안 가족의 역할을 하다가 어느 순간 사랑임을 깨닫고 결혼을 통해 진짜 가족이 된다. 주인공들의 사랑은 마치 운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족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어린 시절에 시작된 인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단히 좁은 의미의 운명이다.

<응팔>은 가족 판타지를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 다섯 가족은 10년이 다 되도록 끼니 때마다 서로 반찬을 주고받는, 같은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지는 않지만 같은 음식을 나눠 먹는 ‘식구’나 다름없는 사이다. 덕선이네 엄마와 정환이네 엄마, 선우네 엄마는 정환이네 집 앞에 있는 평상에 매일 둘러앉아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비롯해 부부관계까지 모든 정보를 공유한다. 자녀들이 결혼까지 하게 되면 이런 관계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얘기다. 그 누구도 굳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지 않고, 그 누구도 애써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가치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로서의 가족만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등장인물들 중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부산이나 서울에 번듯한 집 한 채 정도 갖고 있고,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도 부족함 없이 사는 집안의 아이들이다. <응팔>의 성동일은 보증을 잘못 서 전 재산을 날리고 친구인 김성균의 반지하방에 세들어 살고 있지만, 그래도 정규직 은행원이다. ‘봉황당 골목’에 사는 다섯 집은 모두 중산층이다. 그들의 자녀들은 교육을 통해 부모보다 더 나은 직업과 경제적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안에서 짝을 찾아가는 것은 가장 안전한 선택이다. ‘결혼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는 이야기를 가장 낭만적으로 해석한 것이 <응답하라> 시리즈의 사랑 이야기 아닐까. 그런데 <응팔>을 비롯해 <응답하라> 시리즈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성동일의 집안 풍경과 김성균의 집안 풍경은 수많은 물건들을 통해 끊임없이 대비되고 있음에도 인물들은 그러한 경제적 차이에 무심한 듯 행동한다.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가치를 지켜내려면 얼마나 많은 세속적인 욕망이 필요하고, 또 그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짐짓 모른척하고, 그 자리를 우정과 사랑, 믿음, 배려 같은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요소들로 채워넣는다. 솔직하지 않기에 불편하지도 않지만, 솔직하지 않아서 드라마 속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응답하라>는 분명히 성공한 시리즈다.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쉽게 전하는 형식은 독창적이고, 특유의 유머와 감동의 코드로 시청자를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형식과 코드는 독창적이지만 그 안의 이야기는 전진하지 않고 안전을 고집하며 보수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공회전한다. 인물들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성공한 드라마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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