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안인용의 ‘좋아요’가 싫어요
<언니들의 슬램덩크>는 ‘리얼 인생 스토리가 담긴 여자들의 꿈에 대한 도전기’라는 설명처럼 출연자들이 각자 살면서 이루지 못한 꿈에 도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방송 제공
여기만 오면 색깔 낮아지고
다른 리얼리티 프로그램서
흔하게 하는 뻔한 미션을 두고
눈물을 보인다 왜
여성예능이란 키워드를 갖고도
멤버구성을 이렇게 잘해놓고도
화제를 만들어내지 못할까 ‘감동 코드’가 아니라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아니라
도발적이고 풍자적인 유머코드로
도전과 꿈의 내용과 방향을
사회와 세상으로 바꿔야 예능 프로그램의 핵심은 차별화된 콘셉트와 새로운 시도다. <복면가왕> <마이 리틀 텔레비전> <능력자들> 등으로 문화방송이 예능 프로그램에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는 동안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최근 한국방송은 지난달 <언니들>을 비롯해 <어서옵SHOW> <배틀 트립> 등 신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언니들>은 다른 신설 예능 프로그램에 비해 콘셉트가 명확하고 예능의 흐름을 잘 탈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여성 예능 프로그램의 전설과도 같은 <여걸식스>가 한국방송의 작품이기도 했고, <여걸식스>의 에너지를 이어받아 남성 중심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볼 수 없는 화법과 재미를 만들어내면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여성 예능이라는 키워드를 갖고도, 멤버 구성을 이렇게 잘해놓고도 별다른 화제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걸까? <언니들>의 키워드는 ‘여성’ 그리고 ‘꿈’이다. ‘리얼 인생 스토리가 담긴 여자들의 꿈에 대한 도전기’라는 설명처럼 <언니들>에서 출연자들이 각자 살면서 이루지 못한 꿈에 도전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지난 몇 년 동안 ‘힐링’ ‘청춘’과 함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꿈’이라는 착한 단어는 시작부터 기운을 빼놓는다. ‘꿈’은, 온갖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 교양 프로그램에서 적어도 스무 번은 본 것 같은 감동의 드라마를 자동 재생시킨다. 꿈도 재미있을 수는 있다. 꿈을 기존의 맥락과는 다르게 가져오거나 비틀면 충분히 새로울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예측을 빗나가지 않는다. 첫 회에서부터 모든 멤버가 각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어릴 때 데뷔를 해서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잊고 있었던 사소한 꿈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 이야기가 별로라는 게 아니다. 멤버 각자의 이야기는 나름의 의미도 있고 감동도 있다. 그러나 여성 예능에 기대한 것은 이런 감동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가모장’ 김숙과 ‘센 언니’ 제시, ‘치타 여사’ 라미란, 슈트를 입고 수염을 그린 채 <무한도전>에 출연한 홍진경이 ‘대세’가 된 이유는 여성에 대한 편견의 시선을 시원하게 깨부수고, 티브이에서 좀처럼 보지 못했던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여성 예능을 기대한 것도 그 맥락이다. 남성 예능인들이 모여서 형님부터 막내까지 나이로 서열을 정하고 여성에 대한 편견의 시선과 발언을 필터링 없이 노출하면서 여성을 나이와 외모로만 평가하고 대하는 전형적인 화법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여성 예능인이 모여 통쾌하고 풍자적이면서 날카로운 웃음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니들>은 여성 예능을 꿈과 붙여놓고는 여성 예능인이 출연한다는 것 말고는 한국방송 <남자의 자격>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 심지어 <인간의 조건> 시즌 1의 여성편이나 다름없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언니들>에서는 지금까지 김숙의 대형면허 도전기와 민효린의 걸그룹 도전기를 보여줬다. 중간에는 멤버들이 함께 엠티를 떠나 놀이공원, 혼자 밥 먹기, 번지점프 등에 도전했다. 멤버들 각자 개인적인 이유로 선택한 도전이지만 그게 정말 ‘꿈’인지 좀처럼 와닿지가 않는다. 꿈이라기보다 버킷리스트나 취미생활 목록에 가까워 보인다. 꿈이라는 것만 빼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흔하게 하는 뻔한 미션들이다. 꿈과 도전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상황에서 멤버들은 인터뷰와 토크를 통해 속내를 드러내고 눈물을 보인다. 감동을 짜내는 자막과 음악까지 깔리고 나면 이 프로그램이 예능은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감동 코드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재미를 삭제해버린다. 멤버들 간 ‘케미’다. 리얼리티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의 생명은 멤버들 간의 합이다. 서로 잘 모르는 이들이 모여 낯을 가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하나둘씩 합을 맞추며 에피소드를 만들고 그렇게 의외의 웃음이 발생하면서 관계를 만들어간다. 시청자는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보면서 출연진과 친해지고 그 캐릭터들에 감정을 이입하며 열광하게 된다. <언니들>의 멤버들은 둘러앉아 서로의 꿈에 대해 얘기하는 것부터 관계를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멤버들은 시작과 함께 속내를 털어놓고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눈물을 닦아주는 자매가 됐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톡톡 튀던 멤버들이 여기에만 오면 색깔이 확 낮아진다. “(어떤 남자보다) 내가 제일 든든하다”는 김숙의 말이나 “‘센 언니’는 독립적인 사람이다”라는 제시의 말, “‘포스터 걸’로 사는 것도 쉽지 않다”는 티파니의 말, 걸그룹을 하고 싶다고 손을 번쩍 드는 홍진경 등 각을 세울 수 있는 재미있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순간들은 흘러가듯 지나가고 수다와 자기 고백, 눈물만 남는다. 여성 예능이 맞는지 갸우뚱해지는 순간도 있다. 1회부터 <1박2일>의 멤버인 차태현과 김종민, 데프콘이 이들 멤버에게 조언을 한다며 앉아 있더니 2회에서는 조세호가 출연해 멘토이자 퀴즈 진행자를 맡았다. 5회부터는 박진영이 출연해 이들이 도전하는 걸그룹의 프로듀서 역할을 맡고 있다. 박진영은 이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고 이들을 걸그룹으로 만들어낼 예정이다. 스스로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드는 대신 박진영의 눈과 귀, 입을 통과하게 한다. 여성 예능인데 남성 출연자들이 멘토 역할에 서서 조언을 하는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여성 출연자들을 도전부터 성취까지 스스로 해낼 수 없는 이들로 보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여성 예능이라고 남성 출연자가 나오면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여성 예능을 표방했다면 그 색깔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초반에는 여성 출연자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서로를 이끌어가면서 주체적으로 도전에 성공하는 이야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멘토가 필요하다면 의도적으로라도 여성을 초대했다면 어땠을까.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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