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
‘즐거운 인생’으로 돌아온 이준익 감독
‘밀리는’ 중년들한테 “이런 이야기 어때요?” 하는 제안이랄까…그들이 행복을 찾을 권리, 헌법에도 나와 있잖아
“흠이 있을 수도 있지. 아니면 그게 기계지. 내가 기계야?”
〈황산벌〉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 등 이준익 (48) 감독의 작품들처럼 영화가 감독을 빼닮기도 어렵다. 이 감독이 대중과 작가의 경계를 사뿐히 지르밟고 노는 광대라면 그의 영화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리지 않고 흥에 취하게 하는 놀이판이다.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놀이의 힘은 강력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흥에 위아래가 어디 있고 체면과 권위가 어디 있나? 그러니 그의 놀이는 전복적이다. 이 감독의 새 영화 〈즐거운 인생〉은 기러기 아빠, 실업자, 택배기사 등 생활에 찌든 40대 남성들이 20대 때 했던 록밴드를 다시 결성한다는 이야기인데, 왁자지껄한 해방감을 이어받았다. 지난 27일 제작사 ‘아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수학 못해도 살고, 놀아도 세상은 잘 굴러간다”고 말했다.
※원래 차기작이 격정멜로 〈매혹〉 아니었나?
=패륜을 다루는 내용이라 투자자들이 이런 영화는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된대. 하면 망할 거니까 내 돈으로 해야지. 먹고살 거 벌어 놓고 말년에 (〈매혹〉으로) 확 불 지르고 잠적해 버려야지. 그래서 뭘 할까 하다 극장에서 좀 멀어진 40대 이상들한테 ‘이런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제안하는 식으로 〈즐거운 인생〉을 기획하게 된 거지. 기획하고 3일 만에 시나리오 나왔어.
※어떻게 선택을 그렇게 빨리 하나?
=오래 생각하면 항상 ‘삑사리’ 나더라고. 우린 항상 집단 작업이야. 다 듣고 그날 컨디션 좋은 사람 말 따라. 남의 말 잘 들으면 못 만들기도 힘들어.
※〈왕의 남자〉 시나리오는 미적분, 〈라디오스타〉는 방정식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번엔? =삼각함수 정도. 〈라디오스타〉보다 어렵지. 사람(주인공)이 네 명이잖아. ※주변에 그런 ‘잘 안 풀리는’ 캐릭터들이 많나? =대한민국 대다수 중년들은 자기가 잘 안 나간다고 생각할걸. 주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10%나 될까? 주류들이 나머지 90%를 비주류라고 재단하는 거, 나는 불만이야. 시스템이 인간을 대체하는 구조 안에서 40대 이상이 밀려나는 건데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줘야지. 행복을 찾을 권리, 헌법에 나와 있잖아. 우리는 어려서부터 해야 될 일을 강요받아. 그래서 해야 될 일은 줄줄이 말하는데 하고 싶은 일은 몰라. ‘황산벌’은 지역감정 없애자, ‘왕의 남자’는 신분격차 없애자, ‘즐거운 인생’은 세대차이 없애자 그런거지…나도 철 조금 있어
※영화가 한번 신나게 놀아보자는 것 같던데. 촬영장 분위기도 그랬나?
=밤마다 술 마시고 띵까띵까. 내일 찍을 연주곡 치면서 노는 거지. 언젠간 터질 거야(영화 속 밴드의 대표곡) 징징징~.
※한 컷을 두 번 이상 안 찍지 않나?
=똑같은 거 지겹잖아. 난 이래라저래라 안 해. 내가 무슨 신이야? 배우는 꼭두각시가 아니고 창작자라고. 이번에도 정진영 빼고 모두 악기 다룰 줄 몰랐는데 다들 대역 안 가고 자기가 연주할 거래. 의견 대립이 있으면 배우 말을 들어. 나는 영화 전체를 생각하지만 배우는 자기 거만 죽도록 고민하거든. 그러니까 게임 붙으면 배우가 이기지.
※현수 역 장근석만 20대다. 〈라디오스타〉에서도 80년대 가수 최곤과 요즘 밴드의 연대를 그리더니.
=여자들이 (장근석한테만) 꽂힐까봐 걔 분량 안 늘리고 꾹꾹 눌러버렸어. 지금 한국에서 세대간의 거리감이 중요한 문제라고 봐. 부모는 자식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니까 상실감을 느끼고 자식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까 죄책감 느끼고 그래서 세대차도 나잖아. 아버지와 아들뻘이 한 가지 목적으로 연주하면 교감하는 효과가 있잖아. 40대나 20대나 영화 속에선 다 친구 같아.
※그냥 재밌자고 만드는 줄 알았다. 그런 사회적 문제까지 고려할 줄이야….
=〈황산벌〉은 지역감정 없애자, 〈왕의 남자〉는 신분의 격차 없애자 그런 거잖아. 재밌자고 만든 건데 뭔가 있어 보여야 할 거 아냐. 나도 철 조금 있어.
비주류를 합치면 주류보다 훨씬 많아. 그러나 주류의 음모에 놀아나지 말고 주류가 부러워하는 비주류가 되자고!
※음악을 좋아하나 보다.
=철든다는 게 이성을 강화하는 거잖아. 먹고살기 힘들어서 감성을 스스로 억제하는 사람들이 지금 내 나이 때야. 마그리트가 그랬어. 이성으로 중무장한 논리 충돌의 끝은 전쟁이라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벌일 때 미국 젊은이들은 록 하면서 반전을 이야기했잖아요. 철이 들면 목에 힘밖에 더 들어가?
※〈라디오스타〉 할 때 처음엔 이야기에 큰 흥미를 못 느낀 걸로 안다. 〈즐거운 인생〉은 어땠나?
=사실 뻔한 이야기잖아. 인생은 뻔한 거거든. 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지 보여주고 싶었어. 뻔하지 않은 꿈은 황당무계한 거야. 〈즐거운 인생〉이 (주인공들 밴드 생활이 술술 풀린다고) 판타지라 그러는데 영화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주인공들의 사회적 조건은 바뀐 게 없어. 그런데 그들은 즐거워졌어. 영화는 세상을 담는 작은 그릇이라는 게 내 화두야. 세상이 뻔하니 영화가 뻔할 수밖에.
※이준익 감독 작품의 코믹한 부분이 액션과 리액션의 엇박자에서 나온다던데….
=예를 들어 주인공들이 밴드 ‘활화산’ 만들고 첫 연습 할 때 기영(정진영)이 혁수(김상호)한테 “감 잡았냐” 그러잖아. 보통은 “응” 해야 할 거 같은데 씩 웃으면서 “아니” 그러거든. 정박은 심장의 박동에 순응하고 엇박은 엇나가. 엇박자는 민족의 반골 기질이 표현되는 거고 우리 민족의 미학이야. 그러니깐 우리는 뭉치면 안 돼 흩어지면 잘 살아.
※비주류에 대한 애정은 꾸준한 거 같다.
=그들이 다수라서 그래. 수많은 비주류들 합치면 주류보다 훨씬 많아. 비주류들이여, 주류의 음모에 놀아나지 말자. 주류가 부러워하는 비주류가 되자는 거야.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이 광대를 보고 부러워하는 표정을 짓거든. 그게 그 영화의 주제야.
※작품에서 놀이가 항상 중요하다. 그런데 주류의 놀이는 폭력적으로 그리더라.
=주류는 놀이를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쓰니까. 전두환이 ‘국풍80’(80년 신군부가 기획한 축제)을 이용하듯이. 놀이는 해방구인데 이걸 도구로 쓰면 나쁜놈들이지.
※자기 영화에 항상 만족하는 걸로 안다. 〈즐거운 인생〉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장면은?
=나는 팔불출이야. 캐나다로 떠나려던 혁수가 돌아오고 멤버들이 한명씩 아카펠라처럼 화음을 맞추며 모이는 장면.
※좀 느끼한 거 같던데.
=난 눈물이 나던데. 설명적인 대사를 넣는 게 제일 쉬운 방식이야. 내 영화는 점프와 비약이 엄청나게 세. 〈즐거운 인생〉도 비루한 일상에서 시작하는데 한시간 오십분 뒤면 난리치며 노래부르고 있어. 〈왕의 남자〉도 시골에서 줄타던 애가 끝에 보면 궁에 가 있어. 그 차이가 엄청나지. 그래서 장면을 압축하는 기술이 중요해. 처음 보면 허술해 보이지만 두번 보면 앞뒤가 맞을 거야. 아까 ‘아카펠라’ 장면처럼 이미지로 점프를 해가야지 시간 안에 끝에 닿지.
※그런데 극중 부인들은 왜 악랄한가?
=악랄한 게 아니야. 마누라들은 자기 입장을 정직하고 단호하게 말한 거야. 남자들이 철딱서니 없으니까 구박 받아도 싼 거지.
※에누리 없이 필요한 것만 찍지 않나?
=어차피 안 쓸 거 왜 찍어? 그게 다 돈이야.
※이젠 좀 엉성한 부분이 있어도 이준익 스타일이라 그러면 다 그런가 보다 할 거 같다.
=인생에서 우기는 게 왕이라니까.
※아까 마그리트도 인용하고 책을 많이 읽나 보다.
=책 많이 읽은 사람하고 가까이 사귀면 되지 굳이 내가 왜 읽어야 돼? 공부 잘하는 애들 뜯어먹는 재미 정말 좋아. 옆 사람 다섯 시간 읽은 거 난 오분이면 들어. 주변 사람들을 인정해주면 돼. 나보다 가방 끈이 짧아, 얼굴이 못났어, 열심히 안 하기를 해. 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야.
※다음 작품은 남편을 찾아 베트남으로 간 여성 밴드 이야기 〈님은 먼 곳에〉다. 여자가 처음으로 주인공이라 심리를 따라가기 힘들지 않나?
=수애가 주인공인데 주인공 순이 슬픔이 눈에 보여. 시나리오는 작가가 쓰니까 나는 안 힘들어.
※이준익 감독에 대한 기대가 있는데 부담은 느끼지 않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어. 빚을 다 청산했는데 이게 딜레마야. 결핍이 에너지를 생성하는 힘인데 그게 자꾸 채워지니까 헤매고 있는 중이야.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왕의 남자〉 시나리오는 미적분, 〈라디오스타〉는 방정식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번엔? =삼각함수 정도. 〈라디오스타〉보다 어렵지. 사람(주인공)이 네 명이잖아. ※주변에 그런 ‘잘 안 풀리는’ 캐릭터들이 많나? =대한민국 대다수 중년들은 자기가 잘 안 나간다고 생각할걸. 주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10%나 될까? 주류들이 나머지 90%를 비주류라고 재단하는 거, 나는 불만이야. 시스템이 인간을 대체하는 구조 안에서 40대 이상이 밀려나는 건데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줘야지. 행복을 찾을 권리, 헌법에 나와 있잖아. 우리는 어려서부터 해야 될 일을 강요받아. 그래서 해야 될 일은 줄줄이 말하는데 하고 싶은 일은 몰라. ‘황산벌’은 지역감정 없애자, ‘왕의 남자’는 신분격차 없애자, ‘즐거운 인생’은 세대차이 없애자 그런거지…나도 철 조금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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