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가부주석에 이어 18일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오른 시진핑과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사진 왼쪽) 전 부총리.
시진핑 누구인가
고위관료 2세그룹 ‘태자당’ 대표주자
문혁때 산시성 오지서 농민과 7년생활
2007년 상하이 서기 발탁뒤 급부상
고위관료 2세그룹 ‘태자당’ 대표주자
문혁때 산시성 오지서 농민과 7년생활
2007년 상하이 서기 발탁뒤 급부상
10년 전까지도 시진핑(57)은 중국의 보통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이었다. 그를 알더라도 ‘시중쉰 전 부총리의 아들’ 또는 ‘국민가수 펑리위안의 남편’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았다.
2007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는 그의 위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당 서열 6위로 중국 최고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한 그는 차기 지도자 후보로 급부상했다. 이어 이번 17기 5중전회에서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올라 군 권력까지 손에 쥐어 사실상 지도자 자리를 예약했다.
시 부주석은 고위관료 자제 그룹을 의미하는 태자당의 대표주자다. 그의 아버지는 마오쩌둥과 함께 혁명을 지도했던 혁명원로이자 부총리,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부위원장을 지낸 시중쉰이다.
하지만 1962년 시진핑이 9살 때 시중쉰은 반당집단으로 몰려 숙청되면서 16년간 감옥에 갇혔고, 시진핑은 시련을 통해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에서 ‘인민의 삶을 이해하는 지도자’로 단련됐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15살이던 시진핑은 산시성 황토고원의 오지로 하방돼 7년간 농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는 이후 글을 통해 “15살에 황토에 왔을 때 나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방황했다. 22살에 황토를 떠날 때 견고한 인생의 목표를 가지게 됐고 자신 감으로 충만하게 됐다. 여기서 나는 ‘인민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변치 않는 신념을 키웠다”고 회고했다. 당시의 깨달음을 통해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고, 서민적인 친화력도 가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75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칭화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뒤 군사위원회 비서장 겅뱌오의 비서로 군 경력도 쌓았다. 이후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 푸젠성장, 저장성 서기 등을 거치며 중국 개방경제의 중심지에서 순탄한 경력을 쌓은 뒤 2007년 상하이 서기로 발탁돼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아버지 시중쉰이 1970년대 후반 복권돼 79년 광둥성 당서기로 덩샤오핑에게 경제특구 설치를 건의하는 등 중국 지도부에 등장한 것은 시진핑이 정계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데 중요한 인맥과 배경을 제공했다. 시진핑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이끄는 상하이방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를 차기 지도자로 발탁한 사람도 장 전 주석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부주석이 돼 중앙정계에 올라온 뒤에는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후덕한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어 정책 성향이나 비전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태자당과 상하이방에 속하면서도 어느 한쪽 파벌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 아우르는 리더십을 보인 점이 강한 견제를 받지 않고 지도자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그가 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을 맡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그의 통치 아래서 중국은 강력한 1인 지배가 아닌 집단지도체제 성격을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시 부주석은 2008년 3월 부주석 취임 뒤 첫번째 외국방문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해 북한 지도부와 상견례를 했으며, 지난해 12월에는 한국을 방문하는 등 남북한 문제에도 두루 경험을 쌓아왔다.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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