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병사들이 11일 남오세티야 주도 츠힌발리에서 남쪽으로 약 15㎞ 떨어진 제모니코지 마을에서 솟아오르는 포연을 바라보고 있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군과 그루지야군의 충돌로 러시아군 4명이 숨졌고 츠힌발리에 대한 그루지야군의 공중폭격과 포사격이 재개됐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전했다. 제모니코지/AFP 연합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9일에 견줄만한 전환점이다” 러시아와 그루지야간 전쟁이 시작된 2008년 8월8일의 역사적 의미를 <워싱턴포스트>는 이렇게 규정했다. 사회주의권과 소련 붕괴로 미국 쪽으로 기울어진 힘의 추가 다시 이전 상태로 복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그루지야 전쟁을 통해 ‘제국의 귀환’을 선언하고 있다. 반면, 냉전붕괴 이후 기세등등하던 미국은 별다른 대책없이 움추린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돌아온 제국’ 러시아
나토·MD·분리주의 등 에너지 바탕 서방에 ‘역공’
“미국이 우리를 돕는 대신, 방해하고 있어 유감이다.”
지난 11일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각료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내뱉은 말이다. 그는 “‘침략자’(그루지야 대통령)를 ‘희생자’로 바꿔치기하는 (서방의)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며 ‘즉각 휴전’을 요청한 서방국들을 향해 거침없이 불만을 표시했다.
러시아가 엄청난 자신감 속에 그루지야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련 붕괴 뒤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던 모습은 간 곳 없다. 미국과 맞서던 옛 소련 시절의 모습까지 상기시키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11일 “푸틴이 소련 붕괴 이후 겪었던 모욕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고 전했다. 그루지야 전쟁은 부활하는 러시아의 의지 표현과 다를바 없으며, 소련 붕괴 이후 잃어버린 영향력 확대를 의미한다는 분석이다. ‘러시아 제국’의 부활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오일과 가스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데다, 유럽에 거의 독점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세번째로 국방예산이 많은 러시아가 과거의 지위를 회복하기엔 지금이 ‘적기’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가 이번 전쟁의 의미를 확장해서 보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옛 체코에 대한 나치 독일의 침공을 이끈 ‘주데텐 위기’(체코 주데텐의 독일인 자치문제로 불거진 분쟁)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처럼,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의 직접적 원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11일 짚었다. 단순히 그루지야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요구를 꺾는 것이 주요한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다. 대신, 2003~2004년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에서 ‘색깔혁명’으로 친서방 정부가 들어선 뒤, 러시아가 지정학적 측면이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고립된 데 대한 ‘역공’의 의미가 더 크다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러시아로선, 그루지야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마침내 자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게 됐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12일 “옛 바르샤바 조약기구 동맹국들이 나토에 가입하고, 미국이 동유럽에 미사일 방어기지를 설치하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봤던 러시아로선 유혈충돌도 불가피한 것으로 봤을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올해 초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코소보 사태는 러시아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했다. 당시 푸틴 총리는 “이런 심각한 수준의 전례는 향후 국제관계의 틀을 산산조각 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 제국’의 부활은 서방과 비타협적인 푸틴 러시아 총리가 주도하고 있어, 강경 일변도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최근 푸틴은 언론에 등장할 때 소매를 둘둘 말아올려, 남오세티야 국경의 난민들과 같은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2000년 집권하자마자, 체첸 공화국의 분리주의 반군에 맞선 러시아군을 격려하고자 카프카스로 달려갔을 만큼 옛 소련 영토에 대한 애착이 집요하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움츠린 제국’ 미국
이라크·이란 등 ‘발목’…부시 “러 용납안돼” 말뿐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이잖아요!”
지난 11일 오전(한국 시각), <시엔엔>(CNN) 시사프로그램 ‘상황실’의 진행자 울프 블리츠 앵커가 전화 인터뷰를 하던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에게 “왜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냐”고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의 절박한 바람과 달리 러시아-그루지야 전쟁 닷새째인 12일까지도 미국은 그루지야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에 구두로 “즉각적인 폭력의 중단과 모든 군사 활동의 중지”를 요청하는 것 이외에 뾰족한 수를 못찾고 있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해온 초강대국의 체면을 크게 구기고 있는 셈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11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참석차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주권국가인 이웃나라를 침공해 국민이 선출한 민주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러시아의 행동은 21세기에 용납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앞서 그는 9일 베이징에서도 “러시아의 폭격 중단과 양쪽이 8월6일 이전 상태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12일 “만약 러시아가 (미국의 요청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잠정적으로 어떤 결과가 뒤따를지 (부시가)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신문의 지적처럼 미국이 이번 전쟁에 개입할 수단은 거의 없다. <이코노미스트>는 11일 “이라크 주둔 그루지야군을 본국으로 데려다 주는 것을 제외하곤 미국이 손에 쥔 수단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적 조처는 제아무리 미국이지만 함부로 선택할 수 없다. 미국의 선택은 기껏해야 그루지야와의 휴전 협상테이블에 하루라도 빨리 러시아를 설득해 앉히는 것 뿐이다.
러시아는 미국을 별로 개의치 않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전 대통령)는 “미국은 몇 개의 시아파 마을을 파괴한 사담 후세인(전 이라크 대통령)을 사형시켰다”며, 이라크를 침공해 점령한 미국이 이번 전쟁에 개입할 도덕적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러시아간 ‘말이 통할’ 신뢰가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는 전쟁에 단단히 발목이 잡힌 미국이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에 힘을 집중하기도 어려운 형국이다. 여기에 임기를 불과 다섯달밖에 남겨두지 않은 부시의 레임덕과 이란 핵문제 해결에 있어서 러시아의 협조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미국이 러시아에 큰 목소리를 낼 형편이 못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전쟁이 “미국의 글로벌 파워에 대한 도전들이 더욱 확산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있다”며, 이란·이스라엘·파키스탄·레바논·미얀마·짐바브웨 등지에서 미국의 힘과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한 러시아 군인이 11일 남오세티야 츠한발리 외곽에서 숨진 그루지야 군인의 주검을 지나쳐 달리고 있다. 츠한발리/AFP 연합
러시아가 엄청난 자신감 속에 그루지야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련 붕괴 뒤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던 모습은 간 곳 없다. 미국과 맞서던 옛 소련 시절의 모습까지 상기시키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11일 “푸틴이 소련 붕괴 이후 겪었던 모욕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고 전했다. 그루지야 전쟁은 부활하는 러시아의 의지 표현과 다를바 없으며, 소련 붕괴 이후 잃어버린 영향력 확대를 의미한다는 분석이다. ‘러시아 제국’의 부활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오일과 가스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데다, 유럽에 거의 독점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세번째로 국방예산이 많은 러시아가 과거의 지위를 회복하기엔 지금이 ‘적기’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가 이번 전쟁의 의미를 확장해서 보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옛 체코에 대한 나치 독일의 침공을 이끈 ‘주데텐 위기’(체코 주데텐의 독일인 자치문제로 불거진 분쟁)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처럼,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의 직접적 원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11일 짚었다. 단순히 그루지야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요구를 꺾는 것이 주요한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다. 대신, 2003~2004년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에서 ‘색깔혁명’으로 친서방 정부가 들어선 뒤, 러시아가 지정학적 측면이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고립된 데 대한 ‘역공’의 의미가 더 크다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러시아로선, 그루지야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마침내 자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게 됐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12일 “옛 바르샤바 조약기구 동맹국들이 나토에 가입하고, 미국이 동유럽에 미사일 방어기지를 설치하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봤던 러시아로선 유혈충돌도 불가피한 것으로 봤을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올해 초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코소보 사태는 러시아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했다. 당시 푸틴 총리는 “이런 심각한 수준의 전례는 향후 국제관계의 틀을 산산조각 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 제국’의 부활은 서방과 비타협적인 푸틴 러시아 총리가 주도하고 있어, 강경 일변도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최근 푸틴은 언론에 등장할 때 소매를 둘둘 말아올려, 남오세티야 국경의 난민들과 같은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2000년 집권하자마자, 체첸 공화국의 분리주의 반군에 맞선 러시아군을 격려하고자 카프카스로 달려갔을 만큼 옛 소련 영토에 대한 애착이 집요하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12일 휴전협상 중재를 위해 모스크바 크레믈을 방문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만나 의견을 나누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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