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정책연구원 원장 때로 가족이라는 경계는 철옹성같이 안과 밖을 가르면서 그 안의 권력을 가진 자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한다. 가족에게는 이용할만한 취약점이 많고 도전받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 성, 경제력을 수단으로 어린아이나 아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가학적이고 착취하는 관계를 생산해낸다. ‘어금니 아빠 이씨’. 자신과 딸의 병력을 언론에 끊임없이 알려 국민적 후원을 받았고, 아내까지 동원해 성매매 사업을 했고, 계부에게 아내가 강간당하는 영상을 상업적으로 이용했으며, 딸 친구를 성추행한 후 살해했다. 그의 혐의다.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서도 이 정도 엽기적이고 다방면으로 괴기스러운 사건을 접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희대의 괴물이 보여준 끔찍함 때문에 생각과 마음의 문을 성급히 닫고 싶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희귀한 사건에 나는 꽤 익숙한 느낌과 잔상이 남아 아직까지 생각의 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가정폭력과 친족 성폭력이 벌어지는 가정에서 이씨의 아내나 딸과 비슷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이씨의 아내는 17살에 딸을 낳았고, 남편이 알선한 성매매도 했고, 남편의 계부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온몸이 문신으로 덮였고, 32살의 어린 나이에 투신자살을 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는 달라도 남편의 폭력적 지배 밑에 그녀같이 철저히 예속된 상태로 살아가는 여성의 사례는 많다. 자신의 삶의 능력에 대한 최소한의 자신감도 잃은 상태로 저항의 힘을 잃고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살아나가기도 한다. 남편에 대한 과도한 순응뿐만 아니라 자신이 당하는 폭력을 막기 위해 자식을 남편에게 바치는 엄마도 있고, 성폭력 당하는 딸을 외면하면서 무심하게 일상을 살아나가는 엄마도 있다. 정신적 예속과 자기 비하가 심해져 남편을 놓고 성폭력을 당하는 딸에게 성적 경쟁심을 보이는 엄마도 있다. 이씨의 어린 딸은 스스로 친구를 유인하고 친구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시체의 운반을 도왔다. 이후에도 아버지만을 걱정하고 있다고 경찰은 전하고 있다. 이씨의 딸같이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폭력적 지배 질서에서 살아온 경우는 비슷한 면이 있다. 가해자인 아버지를 가해자로서 명료하게 인식해 분노하고 거리두기 하는 피해자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친족 성폭력은 더욱 심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친족성폭력 쉼터 활동가의 이야기다. 아버지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한 여고생의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이 정희 아빠가 멋있다며 부러워하는 말을 듣고 이상해서 물어봤다고 한다. 정희가 친구들에게 자신의 아빠가 사회운동을 했었고 무척 용감하고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라며, 자신이 글쓰기를 잘하는 것도 아빠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자랑했단다. 선생님은 정희가 아빠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심각한 피해 후유증이 아니냐고 활동가에게 물었다는 것이다.(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블로그, http://blogs.ildaro.com/1728) 이 활동가는 쉼터에서 피해자들이 가해자인 아버지를 자랑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드물지 않다고 전한다. 피해자들에게 아버지는 가해자로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지배받으며 의존하고 사랑했던 힘 있는 대상으로 마음속에 복잡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까지 한 이씨 정도는 아니어도 가정 안에서 극악무도한 행동을 하는 가정폭력이나 친족 성폭력 가해자 아버지들은 많다. 아동학대는 아내폭력과 함께 나타나는 비율이 높고, 가정폭력이 있는 집에 친족 성폭력 발생도 잦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행태로 정서적·육체적인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정이 수없이 많다. 문제는 이 현실이 사이코패스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 가족이라는 경계는 철옹성같이 안과 밖을 가르면서 그 안의 권력을 가진 자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한다. 가족에게는 이용할만한 취약점이 많고 도전받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 성, 경제력을 수단으로 어린아이나 아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가학적이고 착취하는 관계를 생산해낸다. 그래서 괴물은 가족 안에서 가장 쉽게 만들어지고 오래 지속된다. 이씨 사건은 특정의 사회적 불안을 형성했다. 친구 집에 아이를 안 보내고, 친구 집에서 먹을 것을 안 먹게 하고, 기부도 할 필요 없다는 등 흉흉한 민심이 돌게 했다. 그러나 우리가 느껴야 할 최대의 공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또다른 이씨 아내와 딸들’의 삶인 것 같다. 이들의 발견과 개입, 보호를 위한 촘촘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정 개인에게 놀라는 것보다 많은 가정에 그런 ‘이씨’가 있을 수 있음을, 절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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