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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산재 예방, 노동자와 함께 현장에서 답을 찾아라

등록 2021-06-17 17:59수정 2021-06-18 02:38

일하는 사람만 볼 수 있는 ‘위험 요소들’
독일, 노사 동수로 현장 중심 진단·처방
‘참여와 자치’가 사망률 10배 차이 낳아

살기 위해 일터로 들어간 사람들이 죽어서 돌아 나오는 회전문을 멈춰 세우려면 산업재해 위험 요인을 방치한 책임을 엄중하게 묻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조처가 쌓여 당연하게 여겨질 때 사람 목숨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사회적 공모 체계의 균열도 기대해볼 수 있다. 이것은 다분히 의지의 문제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충분하지 못한 현실 또한 엄연하다. 산업 현장의 위험 요소는 갈수록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예방 차원에서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커다란 공백도 바로 현장이다.

2018년 12월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내 하청 노동자 김용균씨의 참극이 벌어지기 1년 전, 운영사인 서부발전은 공정별 협력기업의 안전 컨설팅팀 운영, 현장 위험성 발굴을 위한 안전 패트롤 활동 강화, 발주처-협력기관 간 위험성 공유를 위한 안전회의 강화 등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다. 김용균씨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와 유사한 협착 사망 사고가 난 뒤였다. 그러나 1년 뒤 참사는 되풀이됐다. 그 원인을 하나로 환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회사가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기만 했어도 김씨는 참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년 전 현장 노동자들은 ‘2인1조 점검 체계’를 요구했다.

산업재해 발생이 적은 나라들일수록 재해의 책임을 강력하게 묻는 법·제도 못지않게 현장을 대단히 중시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산업 현장의 위험 구조와 요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현장마다 특성에 맞게 안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독일이 대표적이다. 조합 전통이 강한 독일은 재해보험조합이 우리의 근로복지공단(산재 보상)과 산업안전보건공단(산재 예방)의 역할을 함께 맡고 있는데, 9개 산업 분야별로 빠짐없이 재해보험조합이 구성돼 있는 것도 ‘현장성 강화’와 깊이 닿아 있다. 무엇보다 이들 조합에는 노동자가 사용자와 동수로 참여한다. 정부 관료나 사용자가 쉽게 지나치는 위험 요소들을 노동자들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건설재해보험조합 기술감독관이 건설현장에 감독을 나가 현장 관리자, 노동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독일 건설재해보험조합 기술감독관이 건설현장에 감독을 나가 현장 관리자, 노동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독일 재해보험조합의 또 다른 특징은 ‘자치’다. 정부는 보편적인 지침을 만들고, 구체적인 수칙은 산별 재해보험조합이 채워 넣는다. 현장이야말로 ‘전문성의 보고’다. 현장의 전문성이 담긴 재해 위험성 판단과 예방 규칙은 매우 구체적이고 적합성도 높다. 우리나라도 위험성 평가를 하지만 독일이 훨씬 다양하고 세밀하다. 현장에서 규칙을 준수하는지 감독하는 것은 재해보험조합의 가장 중요한 업무이자 권한이다. 기술감독관들이 현장을 누비며 감독하고 과태료를 매기고 기술자문도 한다. 산재가 발생하면 작업 중지 권한도 행사한다. 우리나라의 10분의 1 수준인 독일의 산재 사망률은 노동자의 동등한 참여와 자치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우리나라 경영자 단체들은 틈만 나면 높은 산재 발생률을 현장 노동자들의 ‘안전불감증’ 탓으로 돌리곤 한다. 경영자 단체들은 노동조합 설립과 산재 발생의 상관관계 연구들이 일관되고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주요한 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노조가 생겨 산재 은폐가 어려워지면 통계로 잡히는 산재 발생률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이치나, 산업안전과 관련한 노조의 실질적 권한이 대단히 취약한 현실에는 눈을 감는다. 경영자 단체들이 자신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싶다면 산업안전 대책 수립과 감독에 현장 노동자의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한 뒤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참여가 책임의식을 높인다는 것은 체제를 불문하고 변하지 않는 원리다.

독일의 노동자 참여는 산업안전 분야를 넘어 기업 운영 전반에 걸쳐 매우 방대하게 보장되고 있다. 우리 경영자 단체들이 산업안전에 대한 노동자 참여를 막는 논리가 ‘경영권 침해’인 것과 정반대다. 독일뿐 아니라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에서 노동자를 참여시켜 각종 문제들의 해법을 찾는 경영이 자리잡은 지 오래다. 노동자 참여, 경영 성과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우리 기업들이 보고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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