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대개 모습을 드러내길 꺼린다. 죽을힘을 다해 쫓았지만 긴팔원숭이는 인간을 멀리했다. 그래도 포기하면 안 된다. 어느 순간 쫓는 인간을 지겨워하게 될 터이므로. 그렇게 긴팔원숭이 한 마리가 우리에게 옆을 내주었다. 김산하 제공
[토요판]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2> 정글에서의 경주
<2> 정글에서의 경주
장화 신고, 무전기 들고, 칼 차고
어두침침한 한낮의 밀림을
거미줄에 얼굴이 덮이고
가시덩굴에 어깨가 찢기도록
다니고 또 다녀도 성과가 없었다
원숭이가 여기 있기나 한 걸까 첫 만남은 겨우 5초
계속되는 원숭이와의 밀당
가지마 가지마, 오지마 오지마
녀석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짝사랑남처럼 쫓아다녔지만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열대의 아침은 캄캄한 가운데 시작된다. 빛이 밤을 채 침투하기도 전에 숲은 기지개를 켠다. 단 하루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밀림의 밤을 무사히 보낸 생명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서로 얽히고설킨 생태계를 오늘도 한 바퀴 돌리기 위해 이들은 묵묵히 제자리를 향해 기어가고, 뛰어가고, 날아간다. 간밤에 생이 마감된 이들도 부지기수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기쁨과 기상으로 꾸며진 이곳의 모든 아침은 그래서 특별하다. 식물성·동물성 움직임 구별의 노하우 오늘의 임무는 탐색이다. 대체 여기에 긴팔원숭이가 있기나 한 건지 제일 먼저 알아내야 한다. 이것만 해도 어려운 과제이다. 손쉬운 검색에 익숙한 현대인은 애초에 정보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통 잘 알지 못한다. 직접 현장에 나가 제멋대로 생긴 자연에 인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일은 실로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곳에 동물이 ×마리가 있다”라는 단순한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덧 완전히 환해진 마당에 나는 탐색에 필요한 장비를 펼쳐놓고 점검에 들어간다. 진흙탕인 밀림 속을 걷는 데 필수적인 장화는 뱀으로부터 다리를 보호해주는 중요한 기능도 있다. 최소 10배 확대되는 쌍안경은 동물에 아주 가까이 가지 않아도 되게 함으로써 서로가 편한 ‘안전거리’를 지키게 해준다. 울창한 숲에선 자칫하면 서로 잃어버리기 쉬우므로 무전기를 사용한다. 탁 트인 곳에서 3~4킬로미터 이상도 닿는 성능의 무전기도 수풀이 우거진 이곳에선 기껏해야 1킬로미터가 한계이다. 달려드는 벌레를 아주 약간 막아줄 모자, 길잡이 나침반과 위성위치추적장치(GPS), 길 표시용 나무 테이프, 비 맞아도 젖지 않는 특수 공책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정글용 칼을 칼집에서 꺼내 보았다. 검은 날이 비장하게 번뜩인다. 밀림을 헤쳐 길을 내는 데 쓰는 물건이다. 식물을 자르긴 싫지만 그러지 않고선 도저히 움직일 방도가 없다. 대신 정해진 길을 최대한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큰 칼 옆에 차고 깊은숨 들이켜니 비로소 출정할 마음이 준비되었다. 우리는 좁은 길을 따라 조심스레 걸었다. 밀림은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에도 나뭇잎이 숲 천장의 모든 틈을 메워서 어두침침하다. 충분한 수분 덕분에 빠른 식물 생장이 일어나고, 서로 쭉쭉 뻗으면서 햇빛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나무 꼭대기가 서로 맞닿아 만들어진 이 녹색 융단의 최상위층을 수관부(canopy)라 부른다. 높이가 30미터 이상, 때로는 50미터에 육박하는 수관부 어딘가에 숨어 있을 동물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는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계속 위만을 올려다봐야 해서 목뼈가 아주 죽을 맛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상태의 동물을 알아볼 수 있다면 진정한 프로이고, 보통은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람에 의한 움직임과 동물에 의한 움직임을 분간하는 노하우. 아주 미묘한 차이이지만 흔들림이 전체적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식물성’인지, 아니면 뭔가 이질적인 ‘동물성’인지 경험이 쌓이면 알 수 있다. 한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따라 쭉 스캔하고 치우고, 옆 나무로 시선을 옮겨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잠깐. 갑자기 전방에 나뭇가지가 털썩 아래로 휘어진다. 뭔가 뛰어서 착지한 것일까? 재빨리 살펴보니 거대 다람쥐이다. 꼬리 길이가 성인 팔뚝만한 녀석이다. 희한하게도 아이들 장난감 총에서 나는 레이저 소리를 낸다. 직접 들어야만 믿을 수 있다. 우리의 목표물은 아니므로 통과. 탐색은 계속된다. 아무 수확 없이 온종일 헤매는 날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거미줄에 얼굴이 덮이고, 가시덩굴에 어깨가 찢기도록 다녔지만 성과가 없다. 아직 초반이라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 스스로 위로하며 집을 향한 어느 오후, 예상치도 못한 첫 만남이 일어났다. 길이 왼쪽으로 급회전하는 모퉁이를 지나는 순간이었다. 몸집이 커다랗고 얼굴에 흰 수염이 더부룩하게 난 회색의 긴팔원숭이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던 참이었다. 극히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인간과 긴팔원숭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영장류의 시선이 정확히 맞춰진 첫 순간이었다. “저기다!” 의도치 않은 신호탄에 긴팔원숭이는 힘차게 출발했다. 마치 터보엔진을 가동한 듯 녀석은 엄청난 추진력으로 밀림을 돌파하며 달아났다. 우리는 덤벙대며 황급히 쫓아가려 했지만 벌써 승패는 나 있었다. 하지만 합쳐서 5초도 되지 않는 이 만남에 우리는 모든 희망을 걸었다.
들판에 나가 외쳤다 “이곳에 세 그룹이 있다!”
나는 한국 최초의 야생 영장류 학자로서 이곳에 왔다. 여기서 최초라는 단어를 쓰기 위해 몇 개의 부분집합을 동원하였음을 고백한다. 여러 나라 중 한국, 생물학 중에서도 영장류라는 하나의 분류군, 거기에다 사육되지 않은 야생 상태의 영장류, 이렇게 좁히고 좁히다 보면 모종의 처녀지에 도달하는 수가 있다. 나의 경우는 세 가지의 꾸미는 말로 ‘처음’에 도달한 셈이다. 으스댈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중요한 일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돌아보는 의미와, 생물다양성 감소라는 위기 속 우리의 의무를 깨닫는 의미에서 필요하다. 영장류 연구는 거의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하고 있지만 이 중 자국에 영장류가 자연 서식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한국은 이제 시작이지만 영장류 연구의 역사는 유구하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연구자는 저명한 인류학자인 루이스 리키 박사가 파견한 여성 삼총사이다. 침팬지는 제인 구달, 고릴라는 다이앤 포시, 오랑우탄은 비루테 갈디카스가 맡아 처음으로 장기간에 걸친 행동생태학 연구를 감행하였다. 아무런 기반도 없는 오지에서 무지, 오해, 차별과 싸워가며 수십년 동안 이룬 이들의 업적은 이제 유명하다. 나는 선배들 각자의 고독한 발자취를 생각하며 나의 하루하루를 소화했다. 그들도 나와 같았겠지….
순전히 의지로 수색을 강행한 덕에 조금씩 정보가 모아지고 있었다. A구역에 분명히 긴팔원숭이가 있다. B구역에도 있는 것이 확실하다. 이들은 과연 같은 개체인가 다른 개체인가? 이런 기초 명제부터 확립해야 했다. 제대로 얼굴을 봐도 개체 식별이 안 될 판에 도망가기에 바쁜 애들을 두고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인간도 감각을 가진 동물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숲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수록 원숭이 얼굴도 구별하는 눈이 생긴다. 그들이 자주 다니는 통로도 차츰 알게 된다. 특히 저들끼리 다투는 곳은 영역의 경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확실한 단서이다. 연구를 시작한 지 약 두 달 만에 우리는 긴팔원숭이 집단 세 개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에 세 그룹이 있다!” 나는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 외쳤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긴팔원숭이가 우리로부터 도망가지 않도록 훈련시키는 가장 어려운 단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 점에서 영장류는 매우 특이하다. 동물이란 대개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리기 때문에 몰래 관찰하거나 흔적 등의 이차적 정보에 의존해야 한다. 영장류도 달아나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어떻게든 쫓아가는 데 성공하면, 그리고 그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하면, 어느 순간부터 이들은 포기한다. 어떤 시점부터 인간의 존재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이 특징은 지겨워하는 능력 덕분이다. 지겨움은 호기심의 반대급부이다. 일상이 지루하지 않다면 굳이 새로운 것을 찾을 필요도 없다. 매주 장난감을 바꿔 주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침팬지 사육사의 고초를 들어보았는가. 영장류는 그 어떤 동물보다 호기심이 많고, 그것이 충족되고 나면 완전하게 흥미를 잃는다. 소스라치게 인간을 무서워하던 동물이 어느새 그 공포의 대상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서 무시하기에 이른다.
백기를 들기로 결정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하지만 말이 쉽다. 정글에서 원숭이와 경주라니! 목줄 놓친 우리 집 강아지도 여간 잡기 힘든 게 아닌데, 끝도 알 수 없는 숲 속에서 동물과 달리기 경쟁이 웬 말이냐? 긴팔원숭이는 어깨 관절이 자유자재로 회전하고 두 팔을 번갈아 나뭇가지에 탁탁 걸며 이동하는 이른바 브래키에이션(brachiation)의 달인이다. 날개를 갖지 않은 동물 중 긴팔원숭이보다 빠른 나무동물은 없다. 긴팔원숭이의 날렵한 움직임에 대항할 나의 초라한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이토록 무능하고 꼴사나울 수가! 게다가 할리문은 해발 1000미터 이상의 저산지대이다. 울퉁불퉁 주름 잡힌 모양의 산세는 이 나무 곡예사와 대적하기에 최악의 지형이다. 우리에게 계곡은 그들에게 평지나 다름없다. 나무만 충분히 있으면 알맞은 가지를 골라 일직선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땅의 굴곡을 착실하게 따라가야 하는 사람의 뜀박질은 턱없이 느리다. 이뿐이 아니다. 끝없는 비는 어렵사리 닦은 길을 미끄러운 진흙탕으로 만들어 놓는다. 긴팔원숭이의 탈출 경로가 우리의 길과 얼추 비슷한 방향일 때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한눈으로 초 단위로 멀어지는 긴팔원숭이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른 한눈으로는 장애물이 산적한 바닥을 살펴야 하는 이 어려운 추격은, 그나마 길이 있을 때 가능하다. 녀석이 갑자기 방향을 틀기라도 하면 일일이 길을 내면서 가야 한다. 물론 이런 일은 아주, 아주 자주 일어난다.
준비 탕! 추격이 시작된다. 긴팔원숭이가 풀썩 큰 소리를 내며 제법 떨어진 나무로 뛰어내린다. 그냥 이동이 아니라 도망을 가는 신호이다. 나와 대원 3명은 번개같이 튀어오른다. 도주하는 방향을 기준으로 가장 먼 위치의 대원이 관제탑 역할을 맡는다. 어차피 뒤처졌으니 눈으로 쫓는 거다. “직진이다 직진!”, “삼거리 방향이다!”, “붉은 꽃 쪽으로 간다!” 다 같은 숲인 것 같아도 모든 길,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버섯길, 나무길, 경주길, 땔감길, 최악의 길 등등. 희한하게 의자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곳은 의자길이라 부른다. 길 이름을 외우는 것은 물론, 항공사진으로 보듯이 길 간의 상대적인 위치를 기억해서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추적을 지휘할 때에는 대원들끼리 서로 겹치지 않게 포위하듯 전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작업을 하다 보면 땀과 피와 진흙 범벅으로 귀가하지 않는 날은 없었다.
나는 수백번도 넘게 아득히 멀어져만 가는 긴팔원숭이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한계에 다다른 폐활량과 다리근육을 보살필 겨를도 없이 언덕에 기어올랐는데, 이미 다음 언덕으로 날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매일 정글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인간과 긴팔원숭이의 경주는 설득의 몸부림이다. 가지 마 가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도망가면 쫓아가고 또 도망가면 또 쫓아간다. 어떤 의미에서 이 숲속의 경주는 짝사랑과 닮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우리는 실제로 달리기를 하진 않으나, 하루하루의 미세한 발전을 위해 꾸준히 설득한다. 어제와 오늘의 차이는 작기에 희망이 꺾이기도 하고 힘을 잃기도 한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은 어느 날, 눈에 띄는 성과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긴팔원숭이의 마음을 열기 위해, 나는 수많은 날을 인도네시아의 친구들과 함께 달렸다. 어느 생명이든, 그 생명의 마음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시간이 흘렀다. 추격의 성과가 유난히 나타나지 않는 그룹 하나가 나를 반년이 넘게 괴롭히고 있었다. 나머지 그룹은 이제 웬만해서는 우리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로 한 그룹 A, B, D 중 유독 B그룹만 지칠 줄 모르는 도주 본능을 여전히 발산하고 있었다(C그룹은 지형이 너무 어려워서 중도 포기). 나는 망연자실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걸까? 연구를 시작한 지 8개월째가 된 어느 날, 나는 무거운 가슴을 안고 미리 예정되었던 휴가를 떠났다. 연구지는 보조원들에게 잠시 맡겼다. 아직 실패라고 말할 시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때가 언제인지, 결국 백기를 들기로 결정하는 일은 나에게 달려 있었다. 그때 아리스로부터 소식이 왔다. “아마 믿기 어려울 거다. B그룹 ‘털보’ 알지? 녀석이 드디어 항복했다!” 난 실제로 믿지 않았다. 아니 믿었지만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아무리 사실로 받아들이려 해도 되지를 않았다. 인도네시아로 돌아가 털보 수컷이 앉은 나무 아래에 서자 비로소 모든 게 들어왔다. “글쎄, 저 나무에 탁 주저앉더니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거야. 마치 이제 더는 못 하겠다는 것처럼 말이야!” 아리스의 말처럼 긴팔원숭이는 항복을 외쳤다. 나는? 만세,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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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마 가지마, 오지마 오지마
녀석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짝사랑남처럼 쫓아다녔지만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열대의 아침은 캄캄한 가운데 시작된다. 빛이 밤을 채 침투하기도 전에 숲은 기지개를 켠다. 단 하루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밀림의 밤을 무사히 보낸 생명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서로 얽히고설킨 생태계를 오늘도 한 바퀴 돌리기 위해 이들은 묵묵히 제자리를 향해 기어가고, 뛰어가고, 날아간다. 간밤에 생이 마감된 이들도 부지기수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기쁨과 기상으로 꾸며진 이곳의 모든 아침은 그래서 특별하다. 식물성·동물성 움직임 구별의 노하우 오늘의 임무는 탐색이다. 대체 여기에 긴팔원숭이가 있기나 한 건지 제일 먼저 알아내야 한다. 이것만 해도 어려운 과제이다. 손쉬운 검색에 익숙한 현대인은 애초에 정보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통 잘 알지 못한다. 직접 현장에 나가 제멋대로 생긴 자연에 인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일은 실로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곳에 동물이 ×마리가 있다”라는 단순한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덧 완전히 환해진 마당에 나는 탐색에 필요한 장비를 펼쳐놓고 점검에 들어간다. 진흙탕인 밀림 속을 걷는 데 필수적인 장화는 뱀으로부터 다리를 보호해주는 중요한 기능도 있다. 최소 10배 확대되는 쌍안경은 동물에 아주 가까이 가지 않아도 되게 함으로써 서로가 편한 ‘안전거리’를 지키게 해준다. 울창한 숲에선 자칫하면 서로 잃어버리기 쉬우므로 무전기를 사용한다. 탁 트인 곳에서 3~4킬로미터 이상도 닿는 성능의 무전기도 수풀이 우거진 이곳에선 기껏해야 1킬로미터가 한계이다. 달려드는 벌레를 아주 약간 막아줄 모자, 길잡이 나침반과 위성위치추적장치(GPS), 길 표시용 나무 테이프, 비 맞아도 젖지 않는 특수 공책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정글용 칼을 칼집에서 꺼내 보았다. 검은 날이 비장하게 번뜩인다. 밀림을 헤쳐 길을 내는 데 쓰는 물건이다. 식물을 자르긴 싫지만 그러지 않고선 도저히 움직일 방도가 없다. 대신 정해진 길을 최대한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큰 칼 옆에 차고 깊은숨 들이켜니 비로소 출정할 마음이 준비되었다. 우리는 좁은 길을 따라 조심스레 걸었다. 밀림은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에도 나뭇잎이 숲 천장의 모든 틈을 메워서 어두침침하다. 충분한 수분 덕분에 빠른 식물 생장이 일어나고, 서로 쭉쭉 뻗으면서 햇빛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나무 꼭대기가 서로 맞닿아 만들어진 이 녹색 융단의 최상위층을 수관부(canopy)라 부른다. 높이가 30미터 이상, 때로는 50미터에 육박하는 수관부 어딘가에 숨어 있을 동물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는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계속 위만을 올려다봐야 해서 목뼈가 아주 죽을 맛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상태의 동물을 알아볼 수 있다면 진정한 프로이고, 보통은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람에 의한 움직임과 동물에 의한 움직임을 분간하는 노하우. 아주 미묘한 차이이지만 흔들림이 전체적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식물성’인지, 아니면 뭔가 이질적인 ‘동물성’인지 경험이 쌓이면 알 수 있다. 한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따라 쭉 스캔하고 치우고, 옆 나무로 시선을 옮겨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잠깐. 갑자기 전방에 나뭇가지가 털썩 아래로 휘어진다. 뭔가 뛰어서 착지한 것일까? 재빨리 살펴보니 거대 다람쥐이다. 꼬리 길이가 성인 팔뚝만한 녀석이다. 희한하게도 아이들 장난감 총에서 나는 레이저 소리를 낸다. 직접 들어야만 믿을 수 있다. 우리의 목표물은 아니므로 통과. 탐색은 계속된다. 아무 수확 없이 온종일 헤매는 날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거미줄에 얼굴이 덮이고, 가시덩굴에 어깨가 찢기도록 다녔지만 성과가 없다. 아직 초반이라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 스스로 위로하며 집을 향한 어느 오후, 예상치도 못한 첫 만남이 일어났다. 길이 왼쪽으로 급회전하는 모퉁이를 지나는 순간이었다. 몸집이 커다랗고 얼굴에 흰 수염이 더부룩하게 난 회색의 긴팔원숭이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던 참이었다. 극히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인간과 긴팔원숭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영장류의 시선이 정확히 맞춰진 첫 순간이었다. “저기다!” 의도치 않은 신호탄에 긴팔원숭이는 힘차게 출발했다. 마치 터보엔진을 가동한 듯 녀석은 엄청난 추진력으로 밀림을 돌파하며 달아났다. 우리는 덤벙대며 황급히 쫓아가려 했지만 벌써 승패는 나 있었다. 하지만 합쳐서 5초도 되지 않는 이 만남에 우리는 모든 희망을 걸었다.
인도네시아 밀림에서는 긴팔원숭이를 당해낼 수 없다. 긴팔원숭이는 나무를 타고 수평이동하지만, 긴팔원숭이를 쫓는 과학자는 수직이동하며 전진해야 한다. 김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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