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꿈결 같은 이곳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문명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동물과 한솥밥을 먹으며 보낸 기억이 남긴 이별의 심연이 깊다. 긴팔원숭이의 갖가지 행적을 좇았던 나만의 비숲 전래동화는 딱딱하고 객관적인 글과 수치로 학계에 보고될 것이다. 김산하 제공
[토요판]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20) 비숲을 떠나며
(20) 비숲을 떠나며
비숲. 나는 그곳을 비숲이라 부른다.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난다. 한발 앞서 불어온 바람에 긴박한 소식이 실려 있다. 공백도 잠시, 작품의 서곡처럼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가 내린다.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진다. 적시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검은 흙은 넘쳐흐르는 물을 담다가 그만 벅차 포기하고 하염없이 흘려보낸다. 몸부림처럼 땅을 파고든 뿌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을 들이마신다. 왕성한 생명활동에 박차가 가해진다. 광합성과 호흡에의 열정이 발산한다. 빛을 향한 생장과 만개로 서로를 뒤덮는 녹음의 축제가 숲의 체온을 상승시킨다. 물은 살아 있는 몸을 통과해 수증기가 되어 다시 하늘로 내보내어진다. 따뜻하게 젖은 공기는 더운 구름이 되어 나무 꼭대기에 걸려 무겁게 머무른다. 갑자기 임계점이 찾아온다. 제 무게를 채 이기지 못한 기체 덩어리는 순간 해체된다. 폭죽이 터지듯, 수억개의 물방울이 기체를 배신하고 액체에 투항한다. 또다시 비가 내린다. 숲을 향해 물이 질주한다. 비가 탄생하고, 비가 몸을 맡기는 숲. 숲을 가능하게 하고, 숲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비. 비라는 하늘과 숲이라는 땅의 맞닿음과 상호침투. 지구상의 가장 완벽한 자연현상.
정글, 밀림, 열대우림. 이것이 바로 비숲이다. 나는 비숲에 살았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연구와 탐험이 마무리됐다
전우애 쌓인 현지인들에겐
작별 인사라도 건네지만
동물에겐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이곳에 왜 왔던가
가깝되 적당히 거리를 두는
조용한 동양적 사절이자
진정한 생태적 시적 존재인
긴팔원숭이 팔과 닿고 싶었다 여행가방의 벌레와 먼지들을 이사 보내고…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연구는 종료되었고 탐험은 마무리되었다. 흐리고 무거운 날씨가 나의 마지막 날을 둘러싸고 있다. 몇 년 동안 꿈쩍도 안 하던 커다란 여행가방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어리둥절해한다. 그곳을 보금자리로 삼았던 벌레와 먼지들도 툴툴거리며 마지못해 이사를 간다. 남겨질 물건과 돌아갈 물건. 이를 판단하는 일에는 결단력과 슬픔이 수반된다. 언젠가 돌아올 것을 대비해서 나의 야외용 바지와 웃옷을 몇 벌 남겨두기로 한다. 어차피 흙과 땀과 피로 물든 것들을 누구한테 줄 수도 없다. 닳아빠진 슬리퍼와 장화는 마을에서 물려받을 후계자를 찾아본다고 한다. 이 큰 사이즈에 맞을 사람이 있을까, 이젠 둘도 없는 친구가 된 연구보조원 아리스가 놀리듯 혀를 끌끌 찬다. 다행히 나의 이 작은 방은 연구의 바통을 이어받을 후배 과학자가 머지않아 온기와 고독함으로 채울 것이다. 완전히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어느새 휑하게 빈 이 공간을 바라보는 나는 어색한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해 건네는 외마디 인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야생 긴팔원숭이들이 연구에 협조하게끔 타이른 시간이 반, 그들의 행동과 생태에 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한 시간이 반. 현장의 일이 완료되면 그 데이터를 가지고 통계와 분석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 과학의 과정이다. 삶의 방식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거나 컴퓨터 화면과 오래 씨름하는 생활로 급격히 전환되어야 한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자유인처럼 숲을 활보하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 동물과 한솥밥을 먹으며 그들처럼 살았던 연구자일수록 이 변화는 불연속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별의 심연도 깊다. 말 그대로 숲에서 사투를 함께 벌인 현지인들과는 끈끈한 전우애가 다져진다. 그래도 이 사람들에겐 작별 인사라도 주고받을 수가 있다. 동물에겐 안녕을 고할 수가 없다. 아무리 마음을 전해도 나뭇가지에 앉은 긴팔원숭이는 가만히 쳐다만 볼 뿐이다. 감각이 뛰어난 그들이기에 어쩌면 약간의 차이를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시선이 좀 다른걸. 맞아. 오늘은 달라. 오늘은. 비가 내린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엉켜 있고 모두가 미물에 지나지 않는 비숲에서 오직 비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비는 풍요 속의 빈곤을 가져온다. 엄청난 강수량으로 토양의 영양물질마저 씻겨 내려가 열대우림의 토양은 영양적으로 열악한 편이다. 풍부한 미생물, 균류 등의 분해자는 동식물의 사체를 너무나 빨리 분해하고 재활용시킴으로써 흙에 유기물이 축적될 겨를이 없다. 그래서 열대우림을 개간하고 나면 오히려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 햇빛과 영양분이 제한자원인 이런 상황은 모든 식물이 모든 식물에 대해 무한하고도 개별적인 경쟁을 벌이게끔 한다. 그 결과 생성되는 것이 바로 이 광대한 녹색제국이다. 그 두터운 층위는 빛도 함부로 뚫고 들어오지 못해 비숲의 안은 어두침침하다. 어둠은 숨을 곳을, 복잡함은 살 곳을 만들어준다. 제국이 융성할수록 엄청나게 다양한 생물의 죽살이가 펼쳐진다. 극미한 차원에서부터 생태계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명의 드라마가 관객 하나 없는 비숲의 구석구석에서 상영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비다. 천둥소리가 우렁차게 대기를 가르면서 비는 중력을 추월하듯이 퍼붓는다. 식물마다 조금씩 다른, 그러나 대략 비슷한 운율에 맞춰 흔들린다. 빗방울을 맞아 털썩 잠시 고개를 떨군다. 몇 초 뒤 자세를 가다듬고 잔잔한 바람놀이 진동을 재개한다. 그러다 다시 털썩. 빗방울의 고른 접촉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이에 응수하는 초목의 움직임은 통일된 테마와 개별적 자유를 동시에 표현하는 합작품을 창조한다. 모든 생명현상의 근원인 물이 세상에 범람하는 시간은, 모든 동식물이 묵묵히 관조하며 엄숙히 받드는 생존과 존재의 향연이다.
제인 구달과 직접 만난 둘도 없는 행운
나는 이곳에 왜 왔던가. 갈증과 더위와 가려움에 시달리는 불쌍한 생물이여, 무엇하러 여기까지 찾아들어왔는가. 긴팔원숭이를 올려다보았다. 내 짧은 팔을 뻗쳐 저 긴 팔과 닿으려고 온 거라 나는 나직이 속삭였다. 한 동물을 향한 이 몸짓에서 그토록 요원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 것은 아닐까. 아름다운 백발의 여인이 생각났다. 왜 침팬지를 사랑하고 연구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제인 구달은 이렇게 답했다. “침팬지는 자연이 인간에게 파견한 대사입니다.” 영장류 중에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를 만나면 우리가 얼마나 자연적인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러면 침팬지가 대표하는 자연계 전체에 마음과 눈이 열린다는 뜻이다. 우리와 너무도 닮은 침팬지는 과연 뛰어난 외교관이다. 나에겐 긴팔원숭이가 그렇다. 긴팔원숭이는 수교와 통상을 논의하는 전격적인 외교관이라기보단, 우리와 가깝되 적당한 거리가 있는 조용한 동양적 사절이다. 비숲의 높고 신비로운 생명세계를 가장 훌륭하게 함축하고 체화하는 그가 나에겐 가장 진정한 생태적 시적 존재이다.
물론 나의 작은 비숲 이야기를 제인 구달이 지난 50년 동안 탄자니아의 곰베 국립공원에서 엮은 대서사시와 견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인류사에 획을 그은 그의 연구와 삶의 족적은 인간을 재정의하고 우리의 자연관을 뒤바꿔놓았다.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업적과 영광의 정점에 있던 그녀는, 1986년 미국 시카고의 어느 학술대회에 참가했다가 참담한 자연 파괴의 실상을 깨닫고 지구와 환경을 위한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올해로 80살이 되는 노령이지만 여전히 일 년에 300일 이상 세계를 돌아다니며 희망과 실천을 호소하는데, 더 늦기 전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하지 않으면 간디 이후 노벨위원회가 저지를 최대의 망신이 될 것으로 많은 이들이 예견하고 있다.
여러 젊은이들에게 그랬듯이, 제인 구달은 나에게도 비숲으로 떠나게 해준 롤모델이 돼주었다. 게다가 나는 그녀와 직접 만나고 알게 된 둘도 없는 행운을 누렸다. 제인 구달은 1996년 첫 방문을 제외하고 2000년대부터 최재천 교수를 통해 다섯 차례 방한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국내 일정의 실무를 책임지는 영광을 누렸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제인 구달이 나를 기억하는지도 몰랐다. 당시에 들렸던 소문은 그녀가 워낙 수많은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분간을 잘 못한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서양 사람이 보기에 동양 사람들 다 비슷해 보인다는데 충분히 이해가 가는 얘기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최측근 수행원 정도는 알아보기 편하도록 나는 그들을 그림으로 그린 일종의 식별 카드를 준비했다. 하지만 웬걸, 제인 구달은 분명하게 사람을 기억했고 그런 안내판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언젠가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지만…”으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보내자 그녀는 나는 물론 내가 하는 연구와 내 어머니까지 잘 기억난다고 답장했다. 거의 하루 단위로 수천 명에게 강연을 하고 고위직 인사를 줄줄이 만나는 강행군 일정 속에서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은 곳곳에서 빛났다. 가령 식당에서 물을 필요 이상으로 따라 주려고 하면 늘 거부했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 잔에 남은 물이 버려지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던 것이다. 식사는 채식으로 아주 간소한 것으로 준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고, 숙소도 늘 똑같은 어느 기숙사 방으로 정했다. 행사 사이에 잠시 짬이 나면 그녀는 편지를 썼다. 만난 사람들에게 일일이 앞으로도 힘써주기를 당부하는 자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하루가 끝날 때마다 오늘 만난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를 정리해서 드리는 일은 우리의 일과가 되었다. 침팬지에서 출발해 모든 생명에게로 나아간 그 삶의 빛이 내 가슴 어딘가를 비췄기에 나도 떠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제인 구달이 동물 대표단과 상봉하는 모습의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그녀는 몹시 기뻐했다. 나는 오죽하랴.
내 심장에서도 눈물과 비가 섞인다
떠나려니 계속 비가 내린다. 비숲에서는 아무도 비를 피하지 않는다. 비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물을 피한다는 건 비숲을 빠져나간다는 의미이다. 어차피 완전한 은신처는 없다. 나뭇가지 밑으로 숨어봤자 틈 사이로 물이 새고, 내린 물이 차오르면 굴속으로도 물줄기가 흐른다. 그래서 긴팔원숭이들도 그저 동작을 멈출 뿐 요란스럽게 피할 곳을 찾지 않는다. 나뭇가지에 무더기로 얹혀 자라는 수많은 착생식물 중 하나처럼, 녀석들은 소리 없이 비의 제의에 동참한다. 이 비는 곧 식량으로 탈바꿈될 것이다. 강우량은 열대우림의 일차생산량을 관장하는데, 우기와 건기를 비교하면 거의 대부분의 비숲에선 우기에 먹을 것이 많다. 내리는 비는 그래서 풍요로운 미래를 의미한다! 내려라! 퍼부어라! 미동도 없는 원숭이의 눈에는 이 인과관계를 깨달은 인지작용의 흔적은 없다. 그러나 수천 년을 거친 이들의 진화 역사와 그 결과 긴팔원숭이가 가진 온갖 적응은 이 인과관계를 이미 반영하고 있다. 비 내림의 기쁨은 이들의 영장류 유전자에 유유히 흐른다.
생물이 넘치는 비숲에는 오히려 인간이 적다. 아니 인간이 적어야만 여전히 비숲으로 존속한다. 그저 생물다양성에 하나의 종을 추가하는 정도로만 존재감이 그쳐야 그것이 비숲이다. 하지만 이제 지구 어디에서도 온전한 처녀림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비숲의 경계에는 늘 현지인들의 촌락이 있다. 비숲의 동물을 연구하러 온 과학자에게 이들은 가장 절실한 동반자이자, 반가운 이웃이자, 잠재적으로 위험하기도 한 경계 대상이다. 과학자의 삶은 이들이 공급해주는 음식, 이들이 지은 집, 이들이 모는 자동차에 완전하게 의존한다. 이들이 쓰는 언어의 통신망에 몸을 담가 문화를 체득하고 동식물을 그 나라 말로 부르는 법을 배운다. 이들과 나누는 서툰 대화와 상호 관대한 웃음은 이 생활의 값진 자산이 된다. 원래 비숲의 경계에 살던 사람과 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그에겐 뒷동산이 나에겐 오지이다. 나는 새로운 대상을 탐구하러 온 존재이기에 이곳과 나의 거리감은 필수적이다. 그 거리가 나는 좋다. 사람으로부터의 거리가 이곳을 온전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이제 비숲으로부터 나를 거두련다. 집으로 돌아가련다. 내가 남긴 엷은 흔적들일랑 대자연이 지혜롭게 지워 주리라 믿는다. 며칠만 지나면 숲 여기저기에 뿌린 내 수많은 발자국은 비에 쓸려 사라지고 없을 것이며, 내가 낸 좁은 길도 금세 뒤덮여 더 이상 길이 아닐 것이다. 연구라는 과업을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비숲에 머물면서 자연에 최소한의 방해만 끼치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이 크든 작든 나는 죄송한 마음이다. 내 칼에 베어진 풀, 내 동작에 화들짝 놀란 짐승, 내 발에 굴러떨어진 돌이 한둘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인간의 배우고 알고자 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부대현상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학문이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생명세계 자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되진 않는다. 꿈결 같은 이곳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문명세계로 돌아가면, 긴팔원숭이의 갖가지 행적을 좇았던 나만의 비숲 전래동화들은 딱딱하고 객관적인 글과 수치로서 학계에 보고될 것이다. 아무도 존재조차 몰랐던 이 특정 영장류 가족들의 하루 일과와 식사 버릇이 전세계에서 열람되도록 문서와 정보로 호환될 것이다. 극히 작은 과학적 보탬이고 미약한 학문적 기여이지만, 나무 사이를 넘실거리는 나의 사랑하는 벗들을 역사 속에 기록해둘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경건한 영예로움을 느낀다. 나무 위의 그들, 땅 위의 나. 우리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은 비숲. 비가 내린다. 비가 내 얼굴을 적신다. 눈물과 비가 섞인다. 내 심장에서도. <끝>
연구와 탐험이 마무리됐다
전우애 쌓인 현지인들에겐
작별 인사라도 건네지만
동물에겐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이곳에 왜 왔던가
가깝되 적당히 거리를 두는
조용한 동양적 사절이자
진정한 생태적 시적 존재인
긴팔원숭이 팔과 닿고 싶었다 여행가방의 벌레와 먼지들을 이사 보내고…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연구는 종료되었고 탐험은 마무리되었다. 흐리고 무거운 날씨가 나의 마지막 날을 둘러싸고 있다. 몇 년 동안 꿈쩍도 안 하던 커다란 여행가방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어리둥절해한다. 그곳을 보금자리로 삼았던 벌레와 먼지들도 툴툴거리며 마지못해 이사를 간다. 남겨질 물건과 돌아갈 물건. 이를 판단하는 일에는 결단력과 슬픔이 수반된다. 언젠가 돌아올 것을 대비해서 나의 야외용 바지와 웃옷을 몇 벌 남겨두기로 한다. 어차피 흙과 땀과 피로 물든 것들을 누구한테 줄 수도 없다. 닳아빠진 슬리퍼와 장화는 마을에서 물려받을 후계자를 찾아본다고 한다. 이 큰 사이즈에 맞을 사람이 있을까, 이젠 둘도 없는 친구가 된 연구보조원 아리스가 놀리듯 혀를 끌끌 찬다. 다행히 나의 이 작은 방은 연구의 바통을 이어받을 후배 과학자가 머지않아 온기와 고독함으로 채울 것이다. 완전히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어느새 휑하게 빈 이 공간을 바라보는 나는 어색한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해 건네는 외마디 인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야생 긴팔원숭이들이 연구에 협조하게끔 타이른 시간이 반, 그들의 행동과 생태에 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한 시간이 반. 현장의 일이 완료되면 그 데이터를 가지고 통계와 분석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 과학의 과정이다. 삶의 방식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거나 컴퓨터 화면과 오래 씨름하는 생활로 급격히 전환되어야 한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자유인처럼 숲을 활보하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 동물과 한솥밥을 먹으며 그들처럼 살았던 연구자일수록 이 변화는 불연속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별의 심연도 깊다. 말 그대로 숲에서 사투를 함께 벌인 현지인들과는 끈끈한 전우애가 다져진다. 그래도 이 사람들에겐 작별 인사라도 주고받을 수가 있다. 동물에겐 안녕을 고할 수가 없다. 아무리 마음을 전해도 나뭇가지에 앉은 긴팔원숭이는 가만히 쳐다만 볼 뿐이다. 감각이 뛰어난 그들이기에 어쩌면 약간의 차이를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시선이 좀 다른걸. 맞아. 오늘은 달라. 오늘은. 비가 내린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엉켜 있고 모두가 미물에 지나지 않는 비숲에서 오직 비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비는 풍요 속의 빈곤을 가져온다. 엄청난 강수량으로 토양의 영양물질마저 씻겨 내려가 열대우림의 토양은 영양적으로 열악한 편이다. 풍부한 미생물, 균류 등의 분해자는 동식물의 사체를 너무나 빨리 분해하고 재활용시킴으로써 흙에 유기물이 축적될 겨를이 없다. 그래서 열대우림을 개간하고 나면 오히려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 햇빛과 영양분이 제한자원인 이런 상황은 모든 식물이 모든 식물에 대해 무한하고도 개별적인 경쟁을 벌이게끔 한다. 그 결과 생성되는 것이 바로 이 광대한 녹색제국이다. 그 두터운 층위는 빛도 함부로 뚫고 들어오지 못해 비숲의 안은 어두침침하다. 어둠은 숨을 곳을, 복잡함은 살 곳을 만들어준다. 제국이 융성할수록 엄청나게 다양한 생물의 죽살이가 펼쳐진다. 극미한 차원에서부터 생태계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명의 드라마가 관객 하나 없는 비숲의 구석구석에서 상영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비다. 천둥소리가 우렁차게 대기를 가르면서 비는 중력을 추월하듯이 퍼붓는다. 식물마다 조금씩 다른, 그러나 대략 비슷한 운율에 맞춰 흔들린다. 빗방울을 맞아 털썩 잠시 고개를 떨군다. 몇 초 뒤 자세를 가다듬고 잔잔한 바람놀이 진동을 재개한다. 그러다 다시 털썩. 빗방울의 고른 접촉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이에 응수하는 초목의 움직임은 통일된 테마와 개별적 자유를 동시에 표현하는 합작품을 창조한다. 모든 생명현상의 근원인 물이 세상에 범람하는 시간은, 모든 동식물이 묵묵히 관조하며 엄숙히 받드는 생존과 존재의 향연이다.
제인 구달이 방한할 때 국내 일정의 실무를 책임지는 영광을 누렸다. 나는 그에게 동물 대표단과 상봉하는 모습의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김산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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