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는 온종일 긴팔원숭이의 세상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들의 세계를 유영하려면 나 역시 몸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감을 깨우는 밀림의 공기와 소리는 긴팔원숭이의 행동을 뒤쫓느라 바쁜 관찰자의 일상에 한 줄기 위로가 된다. 나는 지금 기쁜 마음으로 밀림의 순간을 소개하고 있다. 김산하 제공
[토요판]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7> 정글의 손님들
<7> 정글의 손님들
나를 찾아 먼 길 마다 않고
열대우림까지 온 고마운 이들
노익장 과시한 최재천 선생님
엄마 반찬 배달해 준 동생
연구 모습 찍어준 프랑스 친구… 긴팔원숭이 연구가 어떤 건지
현장경험 원하면 기꺼이 동행
비탈 오르고, 진흙 위를 걷고
하도 넘어지다 못해 낙법도 포기
체력과 운동신경 확인하는 기회 나는 쌍안경을 가장 높은 나무의 중심부에 맞춘다. 졸린 듯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파란 하늘에 큰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물방울 같은 잎의 그림자는 햇빛에 바르르 떨며 매끈한 나무껍질 위에 조용히 춤을 추었다. 공기 중에 띄워놓은 정자처럼 고즈넉한 이 열대의 명당에 앉아 신선놀음을 즐기는 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둥에 등을 대고 기대었다가, 이내 자세를 바꾸어 발을 늘어뜨린 채 엎드리기도 하고, 그것도 지겨우면 아늑한 각도로 난 가지 틈새에 몸을 끼우고선 힘을 쭉 빼기도 했다. 벌레와 더위가 닿지 않는 저 높은 곳에서 취하는 완전한 휴식. 무성한 잎과 잔가지를 통과하면서 적당히 누그러진 산들바람이 자장가처럼 털을 어루만지면, 한낮의 졸음이 옛 기억처럼 느닷없고 달콤하게 찾아온다. 잘 익은 탐스러운 과일로 채운 배가 숨결 따라 오르락내리락거린다. 더이상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는다. 녀석들이 잠들었다. 나는 조용히 쌍안경을 내린다. 동물 관찰자와 스토커 사이에서 야생의 한가운데에서 시간이 멎는 이런 순간. 매일 생사를 다투는 동물조차 쉼의 세계에 몸을 맡기는 이때에 나만은 그럴 수가 없다. 마음은 저들처럼 여유로움을 갈망하고, 그들 못지않게 즐길 줄도 알지만, 내겐 한눈을 팔 권리가 없다. 나는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인 긴팔원숭이가 달콤한 낮잠을 자면 관찰노트에 ‘휴식’이라고 딱딱하게 기록할지언정 덩달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정해진 시각마다 동물의 위치를 파악하고 행동을 눈으로 확인해 기록해야 한다. 제멋대로 나고 마음대로 사는 자연에 객관적인 체계를 부여해야 하는 임무를 진 과학자이다. 그래야지만 학계에 보고가 가능하고, 지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 누구보다 인간이지만, 연구 현장에서만큼은 철저히 이성적인 존재이길 요구받는다. 과학이고 학문이고 전혀 사정을 모르는 긴팔원숭이들은 여전히 한껏 늘어진 채로 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세계의 심각한 학자들의 눈앞에 몇 개의 점으로 표시될 것을 상상이나 할까.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세월아 네월아 쉴 것만 같아도 언제 갑자기 일어나 숲 탐방을 재개할지 모를 일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동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들의 특성이나 습성을 이해하기 위한 탐구행위이다. 영역싸움이나 도피행동, 사회성 등이 일어나는 근접 또는 궁극적 원인을 밝히는 작업이다. 전자는 그 행동이 일어나는 생리적 및 구조적 기작(메커니즘)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애초에 그 행동이 생겨나게 된 진화학적 이유를 말한다. 곤충의 작은 몸짓에서 고래의 집단까지 동물학자는 관찰과 분석에 의거하여 이종(異種)이란 과학적 대상을 이해하려 한다. 그런데 동물 중에서도 영장류를 쫓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다 보면 이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것 말고도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서일까? 아침에 기지개를 켜고, 밥 먹다 낮잠 자고, 서로 엉켜 올라타며 놀다가,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든다. 울다가 웃고, 먹고 싸고, 싸우다 화해하는 생활, 어디서 많이 본 장면들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반복되는 이 주행성 생활 패턴은 우리네 사는 모습을 꼭 빼닮았다. 그래서인지 영장류 연구는 동물을 관찰한다는 경험과 더불어 누군가의 스토커가 되어버린 기분마저 들게 하는 특징이 있다. 관찰을 당하는 영장류의 반응도 남다르다. 동물들은 대개 정신없이 자기 일을 하거나, 도망가거나, 무관심하다. 영장류는 쳐다보는 자를 쳐다본다. 대체 넌 뭐 하는 녀석인고? 한심한 듯 묻는 눈초리로 대면하고 응시한다. 노트에는 횟수와 빈도 등의 수치가 기록되지만, 머릿속에는 심상과 기억이 남는다. 그들의 삶을 보기 위해서 나에겐 삶이 없다. 단지 남의 삶을 기록할 뿐이다. 긴팔원숭이들은 그날의 소소한 즐거움과 싱싱한 일과 속에 폭 빠져 산다. 생생한 삶의 일인칭으로 살고 또 그 안에서만 사는 그들을 보기 위해 나는 삶으로부터 완벽히 유리된 관찰자가 돼야 하는 것이다. 이곳 마을의 주민들도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밥 먹는 즐거움, 가족과 부대끼는 행복, 내 삶을 산다는 확신으로 그들은 살아간다. 심지어는 나의 연구보조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이 사회 안에서 정정당당한 성인 남자, 잠재적 배우자이자 일꾼으로 인정받으며 이 시골길을 걷고 주말을 만끽한다. 아무도 삶 밖으로 빠져나와 있지 않다. 오직 나뿐이다. 그런 면에서 연구자의 삶은 작가와도 닮았다. 세상 속에서 몸을 담그지 못하고 한 발 물러서서 세상을 ‘보려 하는’ 사람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혼자라서 외롭기보단 삶 밖으로 나와 있어서 외로운 자.
한밤 숲속에서 자동차가 퍼지다
그런 나에게도 방문자가 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열대우림 한중간까지 찾아오겠단다. 어쩌다가 있는 이런 반가운 소식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첫째, 한국어를 마음껏 구사할 기회를 얻는다. 현지어로만 가득 찬 생활 덕에 구강구조의 특정 부위에 좀이 쑤시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둘째, 집안은 물론 숲 속에 닦아놓은 길까지 마음먹고 청소를 하게 된다. 밀림까지 손님맞이 치장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나 지형에 익숙잖은 이들을 위한 배려이자 서비스 정신의 발로이다. 그리고 셋째, 늘 방문자 역할을 하던 내가 오랜만에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마치 이곳의 터줏대감처럼 손님을 맞이하면 잠시나마 삶으로부터 한 발 나와 있는 기분이 덜 드는 효과가 있다. 물론 무엇보다 그리운 이들과 실제로, 물리적으로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믿을 수 없이 신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혼자서 온갖 전야제와 식전행사를 꾸미는 어린아이처럼 비품과 식재료 등을 점검하고 이벤트를 기획한다. 뭐 대단한 대접을 상상하면 물론 오산이다. 내가 놓인 상황의 소박한 조건들을 잘 활용해서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 밀림을 찾아온 모든 방문자들은 이곳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미래에 그 어떤 여행을 가더라도 아마 이곳의 특별함과 비견될 곳은 없으리라, 감히 예측해본다.
도착한 손님을 여기까지 데려오는 일이 언제나 가장 큰 관문이다. 인도네시아 수도인 자카르타와 직선거리로는 불과 약 75㎞ 정도이지만, 온갖 마을과 지형지물을 돌고 돌아 가야 하는 길은 꼬박 5~6시간이 걸린다. 특히나 국립공원 안쪽에는 비포장도로가 많다. 여기서 말하는 비포장이란 우리나라 시골길 수준이 아니다. 때로는 진흙탕에 빠져서 차가 아예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거친 돌로 불안하게 만든 길은 차체와 부딪혀 심각한 타격을 주기도 한다. 그나마 산사태로 길이 묻히거나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이 없어야 갈 수라도 있다. 이런 길을 왕복하며 손님을 픽업하다 보니 차도 골병이 들어 정상이 아니다. 동료 영장류학자인 독일 친구가 왔을 때 차가 길 한중간에서 퍼지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시동을 아무리 걸어도 엔진에 기별도 안 가는데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한밤의 숲 속에 외국인들이 고립된다는 건 심히 위험한 상황이다. 얼마 전에 동네를 오가던 야채장수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해를 당했다는 소식이 당시 내 머리에 맴돌 때였다. 거의 패닉상태에 다다를 무렵, 역시 수석연구보조원의 칭호가 마땅한 아리스가 점화플러그 부근을 열쇠를 쳐서 겨우 시동을 켜는 데 성공하였다. 다행히 차는 더이상 걱정을 끼치지 않고 집까지 안전하게 와주었다. 처음 오는 이들에겐 집까지 이르는 이 첫걸음이 언제나 고생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돌아갈 때쯤 되면 이런 기억은 씻은 듯 사라진다.
사람들은 딱히 관광을 하러 오는 건 아니지만 밀림에서 하는 긴팔원숭이 연구가 어떤 건지 현장경험을 한번쯤은 하고 싶어 한다. 손님이 왔다고 긴팔원숭이가 알아서 특별히 초보자 코스로 데려가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연구팀에 뒤처지지 않게 다니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평소의 체력과 건강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아는 동생이 친구랑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방문자로서 가장 어려운 코스까지 완주하는 기염을 토할 동안, 그 동생은 딱 하루 숲을 경험해보더니 그 여파로 가는 날까지 집에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안 하던 수영을 하면 여기저기 안 쓰던 근육이 결리지 않은가? 군말 없이 야생동물이 택한 길에 복종하며 쫓아가다 보면 필시 꼴사나운 몸짓으로 통과해야 하는 곳이 나오게 마련이다. 네발로 기어가고, 줄을 잡고 비탈을 올라가고, 미끄러운 진흙 위에서 균형을 잡는 자세에 익숙한 도시인은 많지 않다. 심지어는 하도 넘어지다 못해 아예 낙법을 포기한 채, 미끄러지면 그냥 자유낙하 하는 이도 있었다. 오히려 나의 지도교수님인 최재천 선생님은 의외로 민첩한 운동신경을 선보이며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이미 열대에서 다년간 연구 경험이 있는 분이시지만, 이미 옛날 일인데다가 당시에 민벌레나 개미 등 작은 곤충을 주로 조사했기 때문에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아예 지지리도 못하시거나 보란 듯이 잘하실 거라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교수님은 후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교수님, 다시 봤습니다.
자신을 울렸던 숙적 씹어먹은 두 숙녀
어떤 이는 자신의 기술로 연구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연구자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추억을 남겨준다. 잠시 머문 프랑스 친구는 나의 연구하는 모습을 사진 찍어 주어 훗날 숱한 발표 및 프로필 용도로 쓰게 될 소중한 시각 자료를 제공하였다. 한국에서 온 지인 중에서 긴팔원숭이 사진을 여러 장 찍어준 이도 있었다. 정작 연구자는 행동 데이터를 수집하느라 동물 자체를 감상하며 사진 찍을 여유가 사실상 없기 때문에 이런 방문자의 역할은 매우 쏠쏠한 도움이 된다. 아리스의 동생인 한 인도네시아 친구는 그냥 형을 보러 왔지만 연구보조원 못지않은 필드 실력으로 긴팔원숭이 탐험에 큰 보탬이 되어 주었다. 유일하게 가족대표로 온 막냇동생은 어려운 절벽 등반을 동행했고,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이 깃든 밑반찬을 배달해주었다. 이런 분들을 두고 우리는 밥값을 하는 손님이라 칭하곤 했다.
선배를 보러 놀러 온 연구실 여자 후배 두 명은 예상치 못한 계기로 한밤중에 별미 야식을 하게 된 사건도 있었다. 둘은 쓰레기를 태운다며 집 옆 소각장으로 향했고, 그동안 나는 유유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 분 뒤 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둘 다 머리를 감싼 채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황급히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눈물의 진원지를 살펴보니 머리에 커다란 혹이 벌겋게 커지고 있었다. 말벌의 짓이었다. 지붕 처마 밑에 달린 말벌집을 보지 못한 채 쓰레기를 태우자, 그 연기에 위협을 느낀 말벌들이 냅다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이런, 집주인에게 달려가 사정을 설명하니 아저씨는 걱정일랑 말고 자기에게 맡겨달란다. “오늘 밤, 모든 게 해결될 거요!” 웬 밤? 나는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일단 자리를 떠났다. 이내 마을에 어둠이 깔렸고, 확실히 캄캄해지자 아저씨는 대나무 장대를 들고 나타났다. 한쪽 끝에는 수건을 칭칭 감고 석유를 뿌린 다음 불을 붙였다. “자 모두들 물러서시오!” 집주인은 불타는 막대로 말벌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먼저 보초병부터 하나둘 때려 태우더니 곧 지원에 나선 온 식구를 고꾸라뜨렸다. 눈앞이 캄캄한 밤이라 벌들은 유일하게 선명한 화염을 공격자로 보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마지막 벌집까지 떨어뜨리자 아저씨는 불을 밝혔다. “주인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자, 이제 먹읍시다!” 엥? 아저씨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벌집 속의 애벌레는 꺼내 생으로 삼켰고, 반쯤 불에 그슬린 성체 말벌들은 주인 아주머니가 기름에 볶아주었다. 나는 이런 때를 대비해서 아껴두었던 보드카 한 병을 열었다. 어느덧 눈물이 그친 두 숙녀는 자신을 울렸던 숙적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문명 속에 살다가 밀림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 가지는, 이곳에서 감수성과 감각이 완전히 열린다는 점이다. 그들은 말로만 듣던 지구의 허파 속을 직접 거닐며 자연의 숨결을 피부로 호흡했다. 그들은 자유로운 동물의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을 좇으며 수풀 속을 함께 뛰어다녔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이 찬란하게 수놓인 밤하늘의 별바다에 잠겨 삶을 돌아보고 미래를 꿈꾸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이 별세계를 만끽하다가 그만 붙잡고 있던 담장을 무너뜨려버렸다. 난간에 의지한 채로 몸을 너무 뒤로 젖혔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부실공사라고 했지만, 그건 모를 일이다. 밀림의 정기가 갑작스런 힘을 내려 주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밀림의 방문자여, 함부로 판단하지 말지어다!
열대우림까지 온 고마운 이들
노익장 과시한 최재천 선생님
엄마 반찬 배달해 준 동생
연구 모습 찍어준 프랑스 친구… 긴팔원숭이 연구가 어떤 건지
현장경험 원하면 기꺼이 동행
비탈 오르고, 진흙 위를 걷고
하도 넘어지다 못해 낙법도 포기
체력과 운동신경 확인하는 기회 나는 쌍안경을 가장 높은 나무의 중심부에 맞춘다. 졸린 듯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파란 하늘에 큰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물방울 같은 잎의 그림자는 햇빛에 바르르 떨며 매끈한 나무껍질 위에 조용히 춤을 추었다. 공기 중에 띄워놓은 정자처럼 고즈넉한 이 열대의 명당에 앉아 신선놀음을 즐기는 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둥에 등을 대고 기대었다가, 이내 자세를 바꾸어 발을 늘어뜨린 채 엎드리기도 하고, 그것도 지겨우면 아늑한 각도로 난 가지 틈새에 몸을 끼우고선 힘을 쭉 빼기도 했다. 벌레와 더위가 닿지 않는 저 높은 곳에서 취하는 완전한 휴식. 무성한 잎과 잔가지를 통과하면서 적당히 누그러진 산들바람이 자장가처럼 털을 어루만지면, 한낮의 졸음이 옛 기억처럼 느닷없고 달콤하게 찾아온다. 잘 익은 탐스러운 과일로 채운 배가 숨결 따라 오르락내리락거린다. 더이상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는다. 녀석들이 잠들었다. 나는 조용히 쌍안경을 내린다. 동물 관찰자와 스토커 사이에서 야생의 한가운데에서 시간이 멎는 이런 순간. 매일 생사를 다투는 동물조차 쉼의 세계에 몸을 맡기는 이때에 나만은 그럴 수가 없다. 마음은 저들처럼 여유로움을 갈망하고, 그들 못지않게 즐길 줄도 알지만, 내겐 한눈을 팔 권리가 없다. 나는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인 긴팔원숭이가 달콤한 낮잠을 자면 관찰노트에 ‘휴식’이라고 딱딱하게 기록할지언정 덩달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정해진 시각마다 동물의 위치를 파악하고 행동을 눈으로 확인해 기록해야 한다. 제멋대로 나고 마음대로 사는 자연에 객관적인 체계를 부여해야 하는 임무를 진 과학자이다. 그래야지만 학계에 보고가 가능하고, 지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 누구보다 인간이지만, 연구 현장에서만큼은 철저히 이성적인 존재이길 요구받는다. 과학이고 학문이고 전혀 사정을 모르는 긴팔원숭이들은 여전히 한껏 늘어진 채로 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세계의 심각한 학자들의 눈앞에 몇 개의 점으로 표시될 것을 상상이나 할까.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세월아 네월아 쉴 것만 같아도 언제 갑자기 일어나 숲 탐방을 재개할지 모를 일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동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들의 특성이나 습성을 이해하기 위한 탐구행위이다. 영역싸움이나 도피행동, 사회성 등이 일어나는 근접 또는 궁극적 원인을 밝히는 작업이다. 전자는 그 행동이 일어나는 생리적 및 구조적 기작(메커니즘)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애초에 그 행동이 생겨나게 된 진화학적 이유를 말한다. 곤충의 작은 몸짓에서 고래의 집단까지 동물학자는 관찰과 분석에 의거하여 이종(異種)이란 과학적 대상을 이해하려 한다. 그런데 동물 중에서도 영장류를 쫓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다 보면 이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것 말고도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서일까? 아침에 기지개를 켜고, 밥 먹다 낮잠 자고, 서로 엉켜 올라타며 놀다가,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든다. 울다가 웃고, 먹고 싸고, 싸우다 화해하는 생활, 어디서 많이 본 장면들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반복되는 이 주행성 생활 패턴은 우리네 사는 모습을 꼭 빼닮았다. 그래서인지 영장류 연구는 동물을 관찰한다는 경험과 더불어 누군가의 스토커가 되어버린 기분마저 들게 하는 특징이 있다. 관찰을 당하는 영장류의 반응도 남다르다. 동물들은 대개 정신없이 자기 일을 하거나, 도망가거나, 무관심하다. 영장류는 쳐다보는 자를 쳐다본다. 대체 넌 뭐 하는 녀석인고? 한심한 듯 묻는 눈초리로 대면하고 응시한다. 노트에는 횟수와 빈도 등의 수치가 기록되지만, 머릿속에는 심상과 기억이 남는다. 그들의 삶을 보기 위해서 나에겐 삶이 없다. 단지 남의 삶을 기록할 뿐이다. 긴팔원숭이들은 그날의 소소한 즐거움과 싱싱한 일과 속에 폭 빠져 산다. 생생한 삶의 일인칭으로 살고 또 그 안에서만 사는 그들을 보기 위해 나는 삶으로부터 완벽히 유리된 관찰자가 돼야 하는 것이다. 이곳 마을의 주민들도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밥 먹는 즐거움, 가족과 부대끼는 행복, 내 삶을 산다는 확신으로 그들은 살아간다. 심지어는 나의 연구보조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이 사회 안에서 정정당당한 성인 남자, 잠재적 배우자이자 일꾼으로 인정받으며 이 시골길을 걷고 주말을 만끽한다. 아무도 삶 밖으로 빠져나와 있지 않다. 오직 나뿐이다. 그런 면에서 연구자의 삶은 작가와도 닮았다. 세상 속에서 몸을 담그지 못하고 한 발 물러서서 세상을 ‘보려 하는’ 사람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혼자라서 외롭기보단 삶 밖으로 나와 있어서 외로운 자.
지도교수인 최재천 교수가 밀림을 방문했다. 민첩한 운동신경은 자연과 동물에 대한 사랑의 증표였나. 김산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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