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팔원숭이는 언제나 아기가 배를 붙잡도록 한다. 등에 업었다간 어깨가 자유롭지 못해 이동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 배에 매달려 롤러코스터를 타듯 밀림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은 어떨까. 김산하 제공
[토요판]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8> 정글 베이비
<8> 정글 베이비
2007년 7월30일까지 없다가
7월31일 갑자기 나타난 꿈꿈이
우리를 보자마자 줄행랑치는
무리 속 도망자 신세 안타까워
B그룹에 2주 휴가를 주었다 밀림의 3차원적 녹색 미로를
빠르게 움직이는 엄마 품에서
정글 생존수칙을 배우더니
이제는 용감하고 활기차게
자기 세계를 탐험하고 다닌다 아이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은 자신이 아이였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아이와 어른이 속한 각각의 세계가 보통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그 사이에 마치 한번 건너면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만 같다. 기념일이 되거나, 어떤 우연한 사건을 겪게 되면 삶을 통시적으로 되짚어보게 될 때가 있다. 참, 한때는 이랬었지. 이러던 것이 저렇게 되었구나. 강 한가운데에 마음의 징검다리를 놓은 것도 잠시. 과거와 현재를 잠시 이어 생각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빠른 물살이 불어닥쳐 모든 것은 다시 잠겨버린다.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똑같이 한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속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성숙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밀림 속에서 동물과 함께하는 나날을 보내는 나에겐 낯설고 별로 와 닿지 않는 개념이다. 고교 학창 시절이 끝나갈 무렵 대학 입학원서를 쓰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지겨워 보이는 학과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원할 수 있는 거지? 함께 유치한 놀이를 하며 시시껄렁한 잡담을 즐기던 녀석들이 하루아침에 억지 어른으로 둔갑해버린 것이 어색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딱딱하기 그지없는 분야의 비전을 검토하는 그들을 지켜보며 나만 홀로 제자리에 머무른 듯한 씁쓸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리시간만 되면 선생님의 첫마디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잠에 빠지던 애가 공대가 전망이 좋다며 그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다니! 저런 면모가 이른바 ‘철이 드는’ 것이라면 나에게 어른다운 성숙함은 요원한 것이구나. 나는 거의 확신에 찬 결론을 내렸다. 내 안의 어린이가 사랑한 원숭이 탐험 동물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부터 나와 비슷한 부류를 만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에서 극소수에 해당되는 집단이지만, 막상 하나둘씩 만나게 되면 생각보다 수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온갖 곤충, 새, 양서파충류, 포유류, 그리고 기생충까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이제 제법 된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동물에 관한 시시콜콜한 얘기가 당연한 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충분한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껴야 했다. 스스로를 어엿한 동물 연구자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점과 선으로 된 그래프, 복잡한 컴퓨터 화면, 머리 아픈 수식을 동물 못지않게 좋아해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동물학자의 일과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은 여타 회사원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컴퓨터 작업이다. 데이터를 입력하고, 분석을 돌리고, 논문을 작성하느라 애인처럼 모니터를 붙들어 껴안고 지낸다. 물론 애초에 자료를 모을 때는 다르다. 야외에 직접 나가서 동식물을 두 눈으로 보고, 계절과 배고픔과 싸워가며 자료를 수집한다. 이때에야 비로소 어린 시절 벌레를 잡으러 풀숲을 헤매던 나와 연장선상에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내가 본연의 자리에 있다는 자족감이 드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현장에서만 행복하다는 것은 내가 아직 학자로서 미성숙하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하는 딱딱한 작업 또한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완성되는 이야기였다. 이런 상황은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내 안의 어린이로부터 떠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하였다. 그래서 나는 가장 모험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나름의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 낭만적이고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정글로 떠나 재미나는 원숭이를 탐험하는 일. 이거라면 난 할 수 있었다! 내 안의 어린이도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는커녕 신이 나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긴팔원숭이 B그룹의 새끼는 우리 연구팀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아이이다. 녀석의 이름은 꿈꿈(Kumkum)이다. 한국어로 이런 재미있는 어감이 있는 줄 전혀 모른 상태에서, 작명에도 소질이 있는 수석연구보조원 아리스가 지어준 이름이다. 가장 마지막까지 죽어라 도망 다니며 우리를 그토록 괴롭혔던 B그룹의 귀염둥이라 특별하기도 하지만, 언제 태어났는지 그 정확한 날짜를 알기에 더욱 정이 가는 아이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탄생 시각까지 거의 아는 셈이다. 그 이유는 2007년 7월30일 저녁까지는 분명히 없었는데, 이튿날인 7월31일 아침에 느닷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생일날 자체는 전날인지 그 다음날인지 알 수 없다. 이왕이면 애매한 것보다 확실한 것이 낫다 싶어 달의 말일을 생일로 삼기로 했다. 이때는 아직 B그룹이 우리에게 항복하기 전이었다. 지금은 유유히 이들이 있는 나무 밑을 걸어 다니고 떠들어도 예사로 여기지만, 처음에는 우리가 보이기만 해도 36계 전속력 줄행랑이었다. 도망가려는 의지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대립 속에서, 꿈꿈은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쫓기는 신세인 자신을 발견하였다.
우리도 그렇게 매몰찬 사람들은 아니다. 연구도 연구지만 갓 나온 아기와 출산한 어미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줄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도망부터 배우면 장차 커서 뭐가 되리! 게다가 자칫 무리하게 추적하다간 아이가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꿈꿈의 존재를 발견한 것도 어미 긴팔원숭이가 도망가는 모습에서 어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면서부터였다. 평소에는 두 팔을 번갈아 나뭇가지에 척척 걸치면서 빠르게 가던 동물이, 거의 한 팔로만 다니느라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렸던 것이었다. 혹시 팔 한쪽을 다쳤나 유심히 살펴본 결과 손에 까만 덩어리 하나를 쫙 쥐고 절대 놓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마치 손에 지갑을 쥐듯이 새끼를 들고 뛴 것이다. 한 팔로만 도망가다가 갑자기 손을 놓기라도 하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을 연구하면서 단 한 개체라도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연구자 자신이 초래한 죽음이라면 그만큼 악몽 같은 것은 없다. 매의 눈을 가진 아리스가 결국 마지막 확증을 해주었다. “오! 저건 아기야 아기!” 우리는 흔쾌히 2주짜리 휴가를 B그룹에게 일방통보 하였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도 주로 수컷을 괴롭히기로 약속했다. 물론 긴팔원숭이들은 협상테이블에 앉아 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본인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 조건이었으니 무리 없이 받아들였으리라.
영장류의 아이는 필연적으로 롤러코스터와 같은 운명을 타고난다. 살면서 나름의 드라마를 겪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말 그대로 급박한 물리적인 움직임에 익숙해져야 하는 처지라는 뜻이다. 밀림의 삼차원적 녹색 미로 속을 빠르게 움직이는 엄마를 부둥켜안고 있으면, 모르긴 몰라도 웬만한 유원지 열차는 상대도 안 될 정도의 스릴이 있을 것이다. 엄마 품을 벗어나지 않은 채 매일 놀이공원보다 신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은 과연 어떨까?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영장류 가정교육
암컷 영장류는 사람 임산부처럼 의료 및 간호의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애가 딸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매일 밥을 찾아 돌아다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가지각색이다. 그냥 새끼가 아무렇게나 매달리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어미가 취하는 자세조차 하나의 생물학적 적응 현상으로서 종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긴팔원숭이는 언제나 아기가 배를 붙잡도록 한다. 등에 업었다간 움직임에 핵심적인 어깨관절이 자유롭지 못해 이동에 지장을 줄 수가 있다. 비비원숭이 같은 경우는 새끼가 등에 업히고, 일부 여우원숭이 중에는 새끼를 입에다 물고 다니는 종도 있다. 안경원숭이는 먹이를 찾는 동안 아이를 적당한 곳에 숨겨놓기도 한다. 맡아주는 이가 없는 탁아소라고나 할까?
좀더 흥미로운 것은 영장류의 가정교육이다. 말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매일매일을 함께하는 어미와 자식 사이에는 무수한 교감과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엄마에게 매달린 채 정글에서 살아가는 법을 근접거리에서 유심히 관찰하며 영장류 아기는 생생한 현장학습을 경험한다. 그래서 영장류 어미와 자식 간의 관계는 그 어느 동물에 비교해도 끈끈하고, 개체의 정상적인 발달에도 핵심적이다. 아빠의 역할은 애초부터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많은 영장류에서 수컷 영장류의 양육활동은 다소 간접적인 형태를 띤다. 직접 보듬어주는 것보다 영역을 방어함으로써 가족에게 식량을 확보해주거나 다른 수컷 또는 포식자로부터 친족을 안전하게 지키는 등의 역할 말이다. 우리네 가정과도 여러 가지로 닮은 모습이다. 요즘은 부모 간의 성역할이 예전보다 그 구분이 흐려졌지만, 전통적으로 아버지는 자식의 일에 관해서 한발 물러선 태도를 취하였다.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 집단에서 수컷과 자식 간의 관계는 바로 그 혈연관계가 암컷만큼 확실하지 않다는 점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받는다. 암컷은 자신의 몸으로 낳은 새끼가 친자식임이 확실하지만, 수컷은 사실상 알 길이 없다. 이를 두고 ‘부성불확실성’이라 한다. 내 자식인지 100% 확실치도 않은데 시간과 노력을 들입다 투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수컷의 역할도 여전히 중요하다. 복잡한 사회관계로 이루어진 집단 내에서 누구랑 협력하고, 배신자는 어떻게 알아보는지, 위험한 동물은 어떻게 맞서는지 등을 몸소 보여준다. 아빠의 멋진 모습은 단순히 귀감이 되는 수준이 아니라 직접적인 교육 자료가 된다.
내 아이는 모글리처럼 키우고 싶다
꿈꿈이 어느덧 무럭무럭 자라 어엿한 긴팔원숭이의 신체 윤곽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는 엄마의 품으로부터 걸핏하면 벗어나 서툴게 덤벙대며 자기만의 세계를 탐험하길 즐겼다. 어찌나 용감하고, 적극적이고, 쉼 없이 활기찬지, 우리는 A그룹의 아기인 암란과 비교하며 꿈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참 꿈꿈은 저렇게 당찬데 암란은 왜 그리 매가리가 없다니?” “누가 아니래? 혼자 저렇게 해보려고 애쓰는 거 봐! 암란이 쟤 반이라도 따라갔으면. 쯧쯧.” 완전히 동네 아줌마와 한가지가 되어버린 나와 연구보조원들은 나무 꼭대기를 쳐다보며 밀림 바닥에 주저앉아 이런 수다를 떨곤 했다. 강심장인 녀석이라 그런지 부모가 좀 심한 장난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꿈꿈은 아버지인 B그룹의 수컷 털보에게 장난을 걸다가 된통 당한 일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달려들어 아빠의 털을 쥐어뜯고 있는데, 하필 오늘은 털보의 심기가 좀 불편한 날이었다. 털보는 갑자기 돌아앉아 아들을 잡아 거꾸로 뒤집더니 다리 한 짝씩 양손에 잡고 마구 뒤흔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빨래 먼지 털듯 흔들기가 끝나자 녀석을 아래 대나무 숲으로 아예 떨어뜨려 버린 것이었다!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좀 심하다 싶었지만, 정작 우리의 꿈꿈은 천연덕스럽게 기어 올라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놀기 시작했다. “역시 꿈꿈은 우리의 꿈나무야!” 나의 편애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일까.
자식을 아무 데나 던지는 행동이야 모범사례는 아니지만,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영장류식 교육법에는 우리가 배워야 될 점이 많다. 말로는 한 가지를 가리키면서 몸으로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는 어른의 언행불일치는 아이들의 세심한 눈에 반드시 포착된다. 아이에게 꿈과 가능성을 얘기하는 그 어른의 삶이 세속과 현실에 찌들었을 때 설득력은 있을 수 없다. 자라나는 야생 영장류의 눈에 보이는 어른의 사는 모습은 단순 참고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머지않아 따라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이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저 살아 있음으로 해서 매일 교육을 하고 있고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원숭이가 뛰노는 밀림에서 젊은 날을 보낼 수 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나는 소위 말하는 ‘원하는 것을 하게 해주는’ 부모님을 가졌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한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와 늘 처음처럼 꿈을 좇는 삶을 추구하는 어머니를 둔 행운아이다. 덕분에 나는 탐험과 사색이 풍부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시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어른 시절로 들어설 수 있었다. 물론 부모님께서 직접 언어를 통해 해주신 좋은 말도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직접 삶과 행동 속에서 교육을 실현해주신 영락없는 ‘영장류 부모님’이셨다.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모글리처럼 키우리라 결심한 적이 있다. 모글리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 <정글북>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정글에 내버려져 곰과 표범을 부모 삼아 커야 했던 모글리는 말을 할 줄 몰랐고, 네발로 기어 다녔다. 좋은 학원도 성적도 학교도 직장도 배우자도 재산도 명예도 미래도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는 언어조차도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완전한 자유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자연이 사는 모습을 보며 자라 그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 원숭이 녀석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리라.
7월31일 갑자기 나타난 꿈꿈이
우리를 보자마자 줄행랑치는
무리 속 도망자 신세 안타까워
B그룹에 2주 휴가를 주었다 밀림의 3차원적 녹색 미로를
빠르게 움직이는 엄마 품에서
정글 생존수칙을 배우더니
이제는 용감하고 활기차게
자기 세계를 탐험하고 다닌다 아이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은 자신이 아이였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아이와 어른이 속한 각각의 세계가 보통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그 사이에 마치 한번 건너면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만 같다. 기념일이 되거나, 어떤 우연한 사건을 겪게 되면 삶을 통시적으로 되짚어보게 될 때가 있다. 참, 한때는 이랬었지. 이러던 것이 저렇게 되었구나. 강 한가운데에 마음의 징검다리를 놓은 것도 잠시. 과거와 현재를 잠시 이어 생각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빠른 물살이 불어닥쳐 모든 것은 다시 잠겨버린다.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똑같이 한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속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성숙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밀림 속에서 동물과 함께하는 나날을 보내는 나에겐 낯설고 별로 와 닿지 않는 개념이다. 고교 학창 시절이 끝나갈 무렵 대학 입학원서를 쓰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지겨워 보이는 학과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원할 수 있는 거지? 함께 유치한 놀이를 하며 시시껄렁한 잡담을 즐기던 녀석들이 하루아침에 억지 어른으로 둔갑해버린 것이 어색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딱딱하기 그지없는 분야의 비전을 검토하는 그들을 지켜보며 나만 홀로 제자리에 머무른 듯한 씁쓸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리시간만 되면 선생님의 첫마디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잠에 빠지던 애가 공대가 전망이 좋다며 그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다니! 저런 면모가 이른바 ‘철이 드는’ 것이라면 나에게 어른다운 성숙함은 요원한 것이구나. 나는 거의 확신에 찬 결론을 내렸다. 내 안의 어린이가 사랑한 원숭이 탐험 동물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부터 나와 비슷한 부류를 만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에서 극소수에 해당되는 집단이지만, 막상 하나둘씩 만나게 되면 생각보다 수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온갖 곤충, 새, 양서파충류, 포유류, 그리고 기생충까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이제 제법 된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동물에 관한 시시콜콜한 얘기가 당연한 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충분한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껴야 했다. 스스로를 어엿한 동물 연구자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점과 선으로 된 그래프, 복잡한 컴퓨터 화면, 머리 아픈 수식을 동물 못지않게 좋아해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동물학자의 일과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은 여타 회사원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컴퓨터 작업이다. 데이터를 입력하고, 분석을 돌리고, 논문을 작성하느라 애인처럼 모니터를 붙들어 껴안고 지낸다. 물론 애초에 자료를 모을 때는 다르다. 야외에 직접 나가서 동식물을 두 눈으로 보고, 계절과 배고픔과 싸워가며 자료를 수집한다. 이때에야 비로소 어린 시절 벌레를 잡으러 풀숲을 헤매던 나와 연장선상에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내가 본연의 자리에 있다는 자족감이 드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현장에서만 행복하다는 것은 내가 아직 학자로서 미성숙하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하는 딱딱한 작업 또한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완성되는 이야기였다. 이런 상황은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내 안의 어린이로부터 떠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하였다. 그래서 나는 가장 모험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나름의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 낭만적이고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정글로 떠나 재미나는 원숭이를 탐험하는 일. 이거라면 난 할 수 있었다! 내 안의 어린이도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는커녕 신이 나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미와 자식 사이에는 말 대신 무수한 교감이 매일매일 일어난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어미는 자식에게 살아남는 법을 생생히 가르친다. 그림 김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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