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팔원숭이의 엄지는 사람의 것보다 짧아 조작 기능이 떨어진다. 그래서인지 자꾸 음식을 흘리면서 먹는다. 긴팔원숭이가 흘린 음식을 먹으려고 나무 아래를 서성거리는 코끼리도 있다.
김산하 제공
[토요판]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⑬ 정글 속 관계의 도가니
⑬ 정글 속 관계의 도가니
하늘 높이 쑥 날아올라 새의 눈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대지는 인간이라고 하는 한가지 종의 동물로 가득 차 있다. 한마디로 득실거린다. 저렇게 잔뜩 모여 바글거리는데, 저 수많은 개체들 사이에는 온갖 종류의 관계가 복잡한 거미줄처럼 쳐져 있겠지 생각한다. 생물이란 원래 한데 모아놓으면 뭔가가 일어나는 법. 작은 시험관 안에 초파리를 여러 마리 잡아 가두어 놓으면 그 안에서 싸움도 일어나고 교미도 일어난다. 끝없이 몰려다니는 인파가 꾸역꾸역 비좁게 사는 걸 보면, 사람의 세상에서 관계 맺기란 너무나도 쉽고 자연스런 일로 보인다. 적어도 위에서 보기엔 그렇다. 아래로 하강 비행을 해 땅에 착지하는 순간,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단번에 깨닫게 된다. 어딜 다 그렇게 가는지, 발 디딜 틈 없이 부산스런 서식지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냥 지나친다. 웃고 떠드는 이도 물론 있다. 개중에는 전화기에다 큰 소리로 말하며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뽐내는 이도 있다. 하지만 군중의 절대다수는 말없이 전진하며, 사회경제적으로 서로 약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하나의 생물로서는 서로 무척 무관하다.
나무를 덮어버리는 ‘목조르는 무화과’
같이 살되 아무 관계도 없는 것. 이것은 생물에게 낯선 개념이다. 생태계라고 하는 자연의 생활시스템에서는 보통 각 종이 적절한 수로 존재하고, 터전을 공유하는 다른 종과 얼마간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더군다나 같은 종이라 하면 늘 잠재적인 경쟁 또는 교미의 상대로서, 서로 위협 또는 번식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동종의 개체끼리는 서로 유의미한 존재이다. 종에 따라 만남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망망대해를 유영하며 짝을 찾는 고래는 멀리까지 전달되는 음파로 알 수 없는 상대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많은 동물이 내는 울음소리나 노래는 여러 다른 기능에 우선해서, 일단 나와 같은 종의 동물을 파악하는 데에 사용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나 개구리야. 너 개구리니. 물론 하나의 음성신호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의사소통의 가장 기본은 의미 있는 상대를 발견하는 것이다.
야생에서도 군중은 있다. 곡식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이동하는 메뚜기 떼, 저녁 하늘에서 펼쳐지는 찌르레기의 군무도 있다. 그러나 자연에서 발견되는 그 어느 집단도, 인간의 줄기차고 일관된 얼굴 없는 군상에 비교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동종에 둘러싸여 지내면서도, 동시에 그중 절대다수와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이다. 우리가 사는 생태계를 단일 종 체계로 전락시키면서 그 종의 수는 무한 증식시키는 두가지의 악수를 두면서 제일 먼저 증발해버린 것이 있다. 바로 관계이다. 딱딱한 도심 속을 걷는 나는 행인과 가로수 모두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로수와 소원하다. 거기에 앉은 까치하고도. 그 밑에 돋아난 풀하고도. 관계의 진공상태가 당연한 세상과 가장 대척점에 놓인 곳을 하나 꼽으라면 주저할 것 없이 열대우림이다. 열대우림은 실타래처럼 꽁꽁 얽힌 관계의 도가니이다. 단순히 많이 모여 있지 않다. 많이 있되 그 있음이 복잡다단하다. 종의 수가 많은 만큼 관계의 수도 많다. 서로 먹고 먹히거나 싸우고 교미하는 직접적인 관계에서부터, 씨앗이나 꽃가루를 퍼뜨리고 굴을 파주거나 물질을 순환시키는 간접적인 관계까지 연결의 양상은 다양하다. 어차피 생물이 산다는 것은 다른 생물에게 의지한다는 간단한 진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 이 생물의 연이 모이고 모여 탄생하는 생명력의 폭발이 바로 열대우림이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가면 더 살아있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대축제에 초대된 영광과 환희이다.
못 배운 애들처럼 마구 흘리며
식사하는 나무 위 동물 덕분에
자원이 땅으로 골고루 분산된다
원숭이들 식사시간에 밑에선
코끼리가 기다리고 있기도 한다 열대우림에 살림 차린 생물들은
많이 모여 있되, 복잡다단하다
먹고 먹히고, 싸우고 교미하고
씨앗이나 꽃가루 퍼뜨려주고
굴 파주거나 물질을 순환시킨다 오랜만이다 얘들아! 나는 아침 일찍 마주친 A그룹을 향해 인사했다. 연구 초창기부터 가장 협조적이고 가장 추적하기에 무난한 이 긴팔원숭이 가족은 친척을 만나는 것과 닮은 반가움을 준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이들도 우리를 알아보는 눈치이다. 수컷은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지 볼일을 보고, 아직도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암컷은 아기를 데리고 거리를 유지한다. 나의 정글 에피소드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A그룹의 젊은 처녀 아스리는 마치 반가운 듯 힘차게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닌다. 첫번째로 향한 목적지는 계곡 근처에 난 무화과나무. 벌써 사흘째 같은 나무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바람에 온 숲을 헤매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냠냠 짭짭.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급한 손놀림은 최대 분당 30번 과일을 집어 먹는다. 말이 과일이지 직경이 1㎝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열매이다. 같은 무화과 종류라도 열매가 배만한 것도 있다. 이런 것은 긴팔원숭이들도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즐길 줄 안다. 이 아침밥상은 정확히 말하자면 나무가 아니라 나무에 엉겨 사는 덩굴식물인 리아나(liana) 형태의 무화과이다. 열대우림의 식물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온대림과는 달리 착생식물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말 그대로 다른 식물에 붙어서 사는 종류이다. 이 중 리아나는 보통 길쭉한 선형구조로서 식물의 가지가 갈라지는 부위에 마구 엉켜서 자라난다. 리아나가 심하게 엉킨 나무를 보면 대체 어디서부터가 나무이고 아닌지 구분하기가 무척 어렵다. 또다른 형태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자신보다 큰 나무의 껍질에 달라붙는데, 접촉 부위에 생기는 공간에 고이는 빗물과 썩는 유기물을 비료 삼아 살아간다. 줄기와 가지에 붙어 있는 ‘승객’ 식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쓰러질 때도 있다. 때로는 이런 착생식물이 숙주에 해당되는 나무를 집어삼켜 버리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름 하여 ‘목 조르는 무화과’(strangler fig)이다. 처음에는 작은 착생식물로 시작했다가 점점 커져서 급기야는 나무를 완전히 뒤덮어 정복한다. 결국 나무는 죽고 이를 둘러싼 무화과의 목질만 남아 안이 텅 빈 탑처럼 다소 기괴하면서도 멋진 구조물이 탄생한다. 사람의 눈에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식물의 이런 슬로모션 씨름은 밀림의 삼차원적 구조를 더욱 분화시켜준다. 다른 말로 하면, 숲을 복잡하게 만들어준다. 복잡하다 보면 여기저기에 틈새가 생기고, 틈새는 보금자리가 된다. 곧 가지각색의 입주민들이 이 주거단지에 살림을 꾸린다. 오늘따라 녀석들이 유난히 흘리면서 식사중이다. 뉘 집 자식들인지 저렇게 칠칠맞지 못해서야. 긴팔원숭이는 우리보다 엄지가 훨씬 짧아 물건을 세밀하게 집는 능력은 시원찮다. 땅에 툭툭 떨어지는 이 아까운 음식의 허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자연은 얼핏 낭비처럼 보이는 현상조차 관계 속에서 지혜롭게 활용하는 노하우도 보유하고 있다. 나무 꼭대기에 달린 음식은 원숭이나 새와 같은 동물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이지만, 땅에 사는 여러 동물에게는 접근 불가능이다. 깔끔하게 먹는 대신 못 배운 애들처럼 마구 흘리면서 식사하는 나무 위 동물 덕택에 손이 닿지 않은 자원이 지상으로 분산된다. 한창 열매가 열린 나무에 온갖 종이 한데 모여 식사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숭이들이 한참 밥 먹는 중인 나무 밑에 덩치 큰 코끼리가 점잖게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표범 또는 검독수리의 위협
물론 원숭이들이 ‘아랫것들’에게 아량을 베풀어주려고 하는 짓은 아니다. 의사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관계가 맺어져 있는 것이다. 낭비만 이런 생태적 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망각은 자연이 자주 활용하는 포인트 중 하나이다. 도토리를 땅에 묻는 다람쥐는 간혹가다 곡식창고의 주소를 잊는 바람에 씨앗이 먹히는 대신 발아에 성공한다. 나무는 고마워하지 않고, 다람쥐는 바라지 않는다.
벌써 30분이 지나도록 식사가 끝날 줄을 모르자 나는 아예 자리를 펴고 주저앉았다. 긴팔원숭이를 추적하는 일도 이렇게 가끔씩은 쉬어가는 코너가 있다. 갑자기 옆 나무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설마 다른 그룹이 여기까지? 식사중인 A그룹 영역 안으로 꽤 들어온 곳인데 그럴 리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은빛 랑구르 원숭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숲 여기저기서 보이는 녀석들이지만 대체 긴팔원숭이 바로 옆 나무에서 뭘 하는 것일까? 주저주저하면서 울상을 짓고 있는 놈을 보고 있자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기도 무화과 열매를 먹으러 온 것이다. 다만 이렇게 줄이 길 줄 몰랐던 모양이다. 자신보다 덩치가 크고, 팔도 (당연히!) 긴 긴팔원숭이를 쫓아낼 순 없었는데, 기분 좋은 아침밥을 생각하고 왔다가 영 실망한 느낌이다. 무화과나무에 닿을 만큼 뻗은 가지에 서서 실제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가 말다가 하는 형국은 심한 내적 갈등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생물의 모습 그 자체였다. 줄이 줄어들 생각을 안 하자 이 녀석은 포기를 하고 가버렸다. 같은 은빛 랑구르 원숭이라 해도 개체마다 다르다. 다른 한 녀석은 끝까지 알짱거리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점잖게 물러난 앞의 친구와는 달리 고집스럽게 붙어서 기회를 엿보자, 위쪽에 있던 수컷이 펄쩍 뛰어내려와 팔로 퍽! 가격을 하는 게 아닌가! 사람이 머리 때리는 동작과 다를 바 하나 없는 한방이었다. 꽥 소리를 지르며 추락하는 랑구르 원숭이에겐 다행히 날개가 있었다. 복잡한 삼차원 구조의 밀림 어딘가에 걸려 비명횡사는 면한 것이다.
덩치가 큰 편이고, 비교적 안전한 나무 위에서만 사는 긴팔원숭이에겐 이렇다 할 천적이 별로 없다. 여전히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순 없다. 호랑이가 멸종해버린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남아 있는 가장 사나운 맹수는 표범이다. 직접 만나기는 하늘에 별 따기이지만, 발자국과 긁은 흔적 그리고 똥을 통해서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표범의 분변을 수거해서 분석한 논문이 수년 전 발표된 적이 있는데, 긴팔원숭이의 뼈도 몇 개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즉, 분명히 먹히긴 하는 것이다. 일본 연구진이 카메라 트랩, 즉 무인카메라로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가 달려 있어 자동으로 동물의 사진을 찍는 기구를 설치해서 조사를 한 적이 있다. 포착된 사진에는 빛나는 두 눈으로 카메라 렌즈를 노려보는 표범의 모습이 또렷하다. 사진 아래 찍힌 시간을 보니 오후 4시55분이다. 가만, 이건 내가 숲에 있는 시간이잖아? 갑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기운이 엄습한다. 내가 정말로 누군가의 먹이가 될 수도 있다는 직접적 가능성은 문명이라는 안전장치에 찌든 영혼에게 신선한 짜릿함을 선사한다. 나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의 존재의 기운에 둘러싸여 산다는 것, 어쩌면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숭고한 인간의 조건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거대 포식자에 대한 이런 감상에 긴팔원숭이들이 동조할 리는 없다. 아무리 가끔 나타나더라도 매일 매 순간 그들의 출연 가능성을 전제로 한 경계생활을 철저히 몸에 익혀야 한다. 운 좋게도 나는 바로 그런 ‘스릴’의 순간을 목격한 적이 있다. 긴팔원숭이 어른은 해당이 없지만, 아이일 경우에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인 검독수리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역시 A그룹, 어느 계곡 부근에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늘 그렇듯) 유유히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미끄러져 왔다. 날개 길이가 족히 3m는 돼 보이는 검은 독수리가 놀라울 정도의 저공비행을 하며 아기 긴팔원숭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울음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수컷의 신호에 맞춰 눈 깜짝할 사이에 온 가족이 그 나무로 모여 독수리를 향해 꽥꽥 소리를 질렀다. 찰나의 차이로 실패한 검독수리는 귀찮은 듯 고도를 높여 빠져나갔다. 긴팔원숭이 가족은 숨을 몰아쉬었다.
축축하고 냄새나는 그것이 하늘에서…
정글 이웃 간의 다양한 관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긴팔원숭이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종(異種)이 있다면 바로 우리인데, 과연 그들과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 긴팔원숭이가 있는 나무 바로 밑에 찰싹 붙어 쫓아다녔지만, 거리를 좁혀 만질 수도 없었고 만져서도 안 되었다. 영장류와 사람은 인수공통 전염병을 서로 옮길 수가 있기 때문에 접촉을 피하는 것은 영장류 연구자의 가장 기초 윤리 중 하나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제 정도 든 녀석들과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언젠가 한번 젊은 처녀 아스리가 거미를 잡아먹으려 땅에 내려온 적이 있다. 끈적끈적한 거미줄이 털에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큰 걸 우적우적 씹어 먹는 모습을 약 2m 앞에서 마주 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았고, 그녀도 나를 보았다. 서로의 두 눈을 응시할 줄 아는 것, 쳐다봐야 할 곳이 눈이라는 걸 아는 것, 과연 영장류이다.
나무 위에서 하산하지 않더라도 뭔가 주고받을 수는 있다. 한번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긴팔원숭이가 수십미터 나무 위에서 떨어뜨린 열매에 맞은 적이 있다. 어찌나 큰 열매였는지 들고 있던 노트를 떨어뜨리고 시퍼런 멍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그게 먹다 남은 과일이어서 천만다행이다. 나의 연구보조원인 누이는 좀더 축축하고 냄새나는 것에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철퍼덕! 그때 누이의 표정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악 소리와 함께 내천으로 달려간 것까지도 말이다. 옆에 물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암 다행이고말고.
식사하는 나무 위 동물 덕분에
자원이 땅으로 골고루 분산된다
원숭이들 식사시간에 밑에선
코끼리가 기다리고 있기도 한다 열대우림에 살림 차린 생물들은
많이 모여 있되, 복잡다단하다
먹고 먹히고, 싸우고 교미하고
씨앗이나 꽃가루 퍼뜨려주고
굴 파주거나 물질을 순환시킨다 오랜만이다 얘들아! 나는 아침 일찍 마주친 A그룹을 향해 인사했다. 연구 초창기부터 가장 협조적이고 가장 추적하기에 무난한 이 긴팔원숭이 가족은 친척을 만나는 것과 닮은 반가움을 준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이들도 우리를 알아보는 눈치이다. 수컷은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지 볼일을 보고, 아직도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암컷은 아기를 데리고 거리를 유지한다. 나의 정글 에피소드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A그룹의 젊은 처녀 아스리는 마치 반가운 듯 힘차게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닌다. 첫번째로 향한 목적지는 계곡 근처에 난 무화과나무. 벌써 사흘째 같은 나무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바람에 온 숲을 헤매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냠냠 짭짭.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급한 손놀림은 최대 분당 30번 과일을 집어 먹는다. 말이 과일이지 직경이 1㎝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열매이다. 같은 무화과 종류라도 열매가 배만한 것도 있다. 이런 것은 긴팔원숭이들도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즐길 줄 안다. 이 아침밥상은 정확히 말하자면 나무가 아니라 나무에 엉겨 사는 덩굴식물인 리아나(liana) 형태의 무화과이다. 열대우림의 식물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온대림과는 달리 착생식물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말 그대로 다른 식물에 붙어서 사는 종류이다. 이 중 리아나는 보통 길쭉한 선형구조로서 식물의 가지가 갈라지는 부위에 마구 엉켜서 자라난다. 리아나가 심하게 엉킨 나무를 보면 대체 어디서부터가 나무이고 아닌지 구분하기가 무척 어렵다. 또다른 형태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자신보다 큰 나무의 껍질에 달라붙는데, 접촉 부위에 생기는 공간에 고이는 빗물과 썩는 유기물을 비료 삼아 살아간다. 줄기와 가지에 붙어 있는 ‘승객’ 식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쓰러질 때도 있다. 때로는 이런 착생식물이 숙주에 해당되는 나무를 집어삼켜 버리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름 하여 ‘목 조르는 무화과’(strangler fig)이다. 처음에는 작은 착생식물로 시작했다가 점점 커져서 급기야는 나무를 완전히 뒤덮어 정복한다. 결국 나무는 죽고 이를 둘러싼 무화과의 목질만 남아 안이 텅 빈 탑처럼 다소 기괴하면서도 멋진 구조물이 탄생한다. 사람의 눈에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식물의 이런 슬로모션 씨름은 밀림의 삼차원적 구조를 더욱 분화시켜준다. 다른 말로 하면, 숲을 복잡하게 만들어준다. 복잡하다 보면 여기저기에 틈새가 생기고, 틈새는 보금자리가 된다. 곧 가지각색의 입주민들이 이 주거단지에 살림을 꾸린다. 오늘따라 녀석들이 유난히 흘리면서 식사중이다. 뉘 집 자식들인지 저렇게 칠칠맞지 못해서야. 긴팔원숭이는 우리보다 엄지가 훨씬 짧아 물건을 세밀하게 집는 능력은 시원찮다. 땅에 툭툭 떨어지는 이 아까운 음식의 허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자연은 얼핏 낭비처럼 보이는 현상조차 관계 속에서 지혜롭게 활용하는 노하우도 보유하고 있다. 나무 꼭대기에 달린 음식은 원숭이나 새와 같은 동물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이지만, 땅에 사는 여러 동물에게는 접근 불가능이다. 깔끔하게 먹는 대신 못 배운 애들처럼 마구 흘리면서 식사하는 나무 위 동물 덕택에 손이 닿지 않은 자원이 지상으로 분산된다. 한창 열매가 열린 나무에 온갖 종이 한데 모여 식사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숭이들이 한참 밥 먹는 중인 나무 밑에 덩치 큰 코끼리가 점잖게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나무를 휘감아가며 자라는 ‘목 조르는 무화과’.
김산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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