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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환경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없는 녹색의 사각지대

등록 2013-12-06 19:52수정 2013-12-07 11:44

도시를 떠나 정글에서 만난 행운은 고요함이었다. 디지털 연결 상태를 강요받지 않아서 좋고 자연의 소리에 침잠해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간소한 살림살이지만 마음 편안한 방의 모습을 전한다. 김산하 제공
도시를 떠나 정글에서 만난 행운은 고요함이었다. 디지털 연결 상태를 강요받지 않아서 좋고 자연의 소리에 침잠해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간소한 살림살이지만 마음 편안한 방의 모습을 전한다. 김산하 제공
[토요판]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⑭ 정글 속 생활의 발견
하루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만 지나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얼마나 헛되이 보내기 쉬운가. 일상은 손수 처리해야 할 소소한 일들로 가득 들어차 있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씻고 치장하는 일에서부터, 온종일 먹고 돌아다니고 앉았다 일어났다가, 결국 밤에 잠들 때까지 생활은 줄기차게 주의력과 실행을 요구한다. 기분에 따라서 전부 귀찮을 수도 있고, 마냥 행복할 수도 있다. 문제는 실컷 일상 업무를 돌봐도 전혀 표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주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하루 종일 집에서 뭘 했냐”는 무식한 질문이 아니던가. 열심히 해도 원점인 일상생활, 반복은 지치게 하고 하루 일과는 짐스럽다.

생활을 돌아보려면 충분히 먼 곳으로 가라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생활의 발견이다. 갑자기 루틴을 깨고 평소에 해보지 않은 일을 시도하는 것도 좋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게다가 잘못하면 잠시 맛을 본 어떤 특별한 경험 덕분에 오히려 일상이 상대적으로 초라해질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린다. 이보다는 대단치 않은 사물과 광경에서도 정신과 감각의 신선함을 찾고 얻을 수 있는 능력이 효과적이다. 선반에 늘 꽂혀 있던 책을 갑자기 꺼내 보는 마음, 벽에 언제나 걸려 있던 그림을 오늘따라 응시해 보는 정성. 가장 주목할 만하지 않은 것에 때때로 주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능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애초부터 이런 능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자신이 살던 세계를 떠남으로써 기존에 누리던 삶을 돌아보고 생활을 재발견할 기회를 얻는다. 현재 속한 곳과 다르면 다를수록 그 간극의 충분함 덕분에 묻혀 있던 면모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면 당연하게 여긴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고, 잃어버렸던 순진함과 설렘을 잠시나마 되찾아 새롭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내 방은 작고 아담했다
책상·의자·책장·침대에
기계라곤 노트북과 스탠드뿐
집 안에서도 특별히 할 것 없고
집 밖으로 나가도 갈 데 없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져 사는
동떨어진 삶이 마음에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이파리 쓰다듬고
고양이의 기지개를 따라하며
눈앞 세계에 충실할 수 있었다

생활을 충분히 돌아보기 위해서는 충분히 먼 곳으로 가야 한다. 가까우면 이미 정의상 제대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먼 곳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르진 않지만, 정말로 다른 곳이 가까운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장거리 이동에 항공기 이용이 일상화되면서부터 멀리 간다는 것은 거리가 아닌 시간적 개념이 되어버렸다. 실제 이동하는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길어졌지만 여행자가 직접 경험하는 것은 기다림, 기다림, 끝도 없는 기다림이다. 창문 바깥을 쳐다봐도 구름은 제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뿐, 내가 전진하고 있음을 상대적으로 알려줄 움직이는 물체가 없다. 정처 없이 공중에 떠다니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덧 정신차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 그것마저 비행기에서 내려 천편일률적으로 생긴 공항을 빠져나와야 숨통이 트이듯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떠남에 소요되는 시간뿐 아니라 거리가 중요한 이유는 공간적 경험이 보다 정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어떻게든 보내고 나면 사라지고, 심지어는 ‘죽여’ 없애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공간은 몸으로 직접 통과해야 하며 집이 여기인 한 간 만큼 똑같이 되짚어 돌아와야 한다. 잠을 자버리거나 눈 감고 외면하는 것이 가능한 시간적 경험에 비해, 공간적 경험은 확실한 물리적 실재성을 지닌다. 목적지가 저 산꼭대기라면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에서 그곳까지 한 뼘 한 뼘의 대지를 전부 더듬으며 가야 하는 것이다. 한 발 한 발 디디다 보면 어느 정도의 힘을 들여야 어느 정도 진척되는지 체험할 수 있다. 내 보폭은 얼마인지, 팔을 쭉 뻗으면 어디까지 닿는지 몸소 측정한다. 돌을 밟을까 흙을 밟을까 그때그때 헤아리고 순간순간 결정한다. 솔방울의 알참, 새소리의 액체성이 똑똑히 오감을 타고 들어온다. 인식과 감흥은 촘촘해진다. 그리고 경험은 완전해진다. 권태와 무의미의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는다.

독서 방해하는 파리, 116마리 대량 학살

나의 숲 속 일상생활은 소박하고 심플했다. 밀림의 첫 나무들이 시작되는 곳으로부터 채 2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나의 보금자리는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이라 여겨지는 건물이었다. 그래 봤자 약간이라도 호사스런 면이라곤 전혀 없는 곳이었다. 벽은 시멘트 하부구조 위에 얇은 나무판자가 세워져 있었고 바닥은 마감재 없이 회색 시멘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몇몇 곳은 나름의 바닥재가 깔려 있기도 했다. 식탁은 조악한 장판 위에 놓여 있었고, 침실 3개 중 2개는 ‘카펫’이 바닥을 덮고 있었지만, 공사장 주위를 두르는 값싼 펠트 재질의 파란색 인조섬유일 뿐이었다. 외벽은 약간의 노란 빛깔이 감도는 미색이, 문과 창틀은 초콜릿 갈색이, 그리고 기둥과 처마 밑은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거실과 방 1개, 오른쪽에 방 2개, 왼쪽에 식당과 부엌 그리고 화장실이 있었다. 정문 바로 바깥에는 지붕이 드리워진 베란다와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여기가 실질적인 거실 역할을 했다. 내부에도 소파 세트까지 구비된 거실이 있었지만 희한하게 반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진 탓에 편안하게 노닥거리긴 어려운 공간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 아니면 우리는 대부분 이 앞마당에 널브러져 수다를 떨었다. 열대지방이지만 고도가 높은 바람에 딱 적당한 온도의 산들바람이 불어왔고, 햇빛에 달궈지는 바닥의 온기와 절묘하게 만났다. 졸음은 말없이 찾아와 읽던 책을 손에서 살포시 떨어뜨렸다.

화창한 날에는 앞마당에 집안 식구는 물론 주변 동물들도 다 모여 휴식을 즐겼다. 식구라 하면 나와 연구보조원 두 명(한 명은 마을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지냈다)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 마당 모임은 조금씩 커졌다. 언제부터인가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안의 일원이 되겠다는 일념하에 백고초려를 했고, 그 노력과 끈기에 탄복한 나는 끝내 거둬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루라는 이름의 이 암고양이는 문 앞 신발 매트에 게으른 자세로 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루에게 연정을 품은 검은 수고양이 한 마리가 툭하면 집으로 들어와 데이트 신청을 하곤 했다. 매너 없이 구는 이 녀석이 집 안에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마당에서 함께 노니는 것 정도는 봐주기로 했다. 여기에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옆집 암탉과 줄줄이 병아리 손님까지 하면 앞마당이 꽉 차곤 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리부터 살고 있던 개미들도 이 앞마당에 주로 줄지어 다녔다. 너무 수가 많아 어쩔 도리가 없는 개미들을 평소에는 그냥 놔두지만, 때로는 너무 난잡하게 사방에 널려 있어 도무지 생활이 불가능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음먹고 개미 인구 조절 정책을 펴곤 하는데, 워낙 번식이 빨라 그 효과는 채 며칠도 가지 못한다. 개미야 정정당당한 하숙자라 치면, 앞마당 모임에 늘 끼고 싶어 부산을 떨며 찾아오는 파리가 제일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그냥 와서 가만히 있으면 모를까, 곧 죽어도 다른 곳 다 제치고 사람의 피부 위에 앉아야 하는 것이 문제이다. 독서를 심하게 방해받은 어느 날 오후, 나는 작심하고 빗자루로 앞마당의 파리를 후려쳐 잡은 적이 있다. 마침 할 일이 없던 차에 심심하던 나의 연구보조원 누이는 툭툭 떨어지는 파리 시체를 모아 수를 세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망자 수는 정확히 116마리에 달했다. 이쯤에서 나는 멈췄다. 해봤자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지만, 왠지 꿈자리에 파리 대왕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악몽을 무서워하며 잠자리에 드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자다 깼더니 커다란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긴히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내 이마 위에 떡하니 앉은 것을 한번 경험한 뒤로는 벌레와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반사 신경으로 튀어나간 손이 이마를 후려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바퀴벌레를 잡던 버릇에 하마터면 내 면상과 베개에 참상을 만들 뻔했던 것이 아닌가.

나의 방은 작고 아담했다. 가구라고는 거의 내 어깨너비만한 책상과 의자, 무릎 높이의 미니 책장, 그리고 침대뿐이었다. 옷을 둘 곳이 없어 나는 여행 가방을 서랍장 대신 사용했고, 옷걸이 대신 벽에 못을 박아 셔츠를 걸어두었다. 진열된 모습이 마치 싸구려 옷가게를 방불케 했지만 어차피 벽지도 없는 방에 약간의 색채를 더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방 전체에서 전기로 돌아가는 기기라곤 노트북과 작은 스탠드 하나. 낡은 물레방아로 돌리는 수력발전기의 용량이 모자라 컴퓨터 사용이 원활치 못했기 때문에 내 방의 전기 사용은 거의 전등 하나에 국한되었다. 오락거리나 장식품, 편의설비라곤 아무것도 없는 지극한 단순함으로 이 방은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둥그런 거울 하나와 몇 장의 사진과 편지를 붙인 것 말고는 나는 꾸밈을 보태지 않았다. 도시로부터 끌고 온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침대 매트리스였다. 이런 시골 방에 원래 있는 종류의 매트리스는 하나같이 물렁한 스펀지라 허리를 작살내는 데 그만이다. 게다가 다음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침대 벼룩이 이미 서식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다른 건 몰라도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채비는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이다. 차에 비해 훨씬 크고 긴 매트리스 3장을 차 지붕 위에 겹겹이 쌓고 묶어 몇 시간 동안 산길을 달렸던 그날을 나는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테다.

따라가기 어렵던 긴팔원숭이와의 어깨동무도 그림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김산하 그림
따라가기 어렵던 긴팔원숭이와의 어깨동무도 그림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김산하 그림

온 동네 주민과 다 돌려본 영화 ‘라따뚜이’

집 밖으로 나가도 갈 데가 없고 집 안에도 특별히 할 것이 없는 제한된 환경이 이 생활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천만의 말씀. 문명 세계의 도시에서는 취향과 선택의 문제이지 정말로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 기분전환이나 눈요기를 위해 취할 수 있는 옵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정글 옆에 사는 나에겐 생활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데에 명확한 한계가 주어졌다. 나는 이 한계가 좋았다. 갑갑할 때도 있었고 벗어나고픈 날도 있었다. 가끔씩 물자를 구하러 도시로 나갈 때 몰아서 이 답답함을 풀기도 했다. 대체로 나는 하늘에서 똑 떨어져 사는 것처럼 동떨어진 이 삶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 이 세상에는 불필요한 연결고리나 끈이라곤 없었다. 핸드폰과 인터넷의 디지털 그물망이 쳐지지 않은 녹색 사각지대, 박테리아처럼 번식하는 정보와 고삐 풀린 자기중계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성소(聖所)였다. 나에겐 어딜 가나 전파에 잡히거나 인터넷에 접속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 대한 오랜 불만이 있었다. 이들은 마치 산소를 찾듯 디지털 연결 상태를 갈구했다.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물론 아니었지만, 네트워크로부터 이탈한다는 것은 거의 문명을 등지는 것과 동격이었다. 안테나 신호가 약해지면 아득한 심연으로 빠지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이를 적극적으로 하면 ‘잠수’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인지 그들은 자신의 이 검은색 심장을 꽉 쥐고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았다.

화면이 지배하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여기 사람들처럼 눈앞의 세계에 충실했다. 빈방을 물끄러미 둘러보았고, 벽에 붙여놓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본 책은 또 보고, 바닥에 떨어진 이파리는 주워서 돌리고 쓰다듬었다. 앞마당에 부는 산들바람에 내 다리털이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눈을 들어 야자나무 잎의 야성적인 움직임에 감탄했다. 끊임없는 벌레의 이민 행렬을 지켜보았고, 음식을 바라보며 식사하였다. 고양이의 기지개를 따라하고, 물고기가 첨벙거리며 남긴 동심원을 따라갔다. 햇빛이 빨래를 말리는 속도를 목격하고, 달빛으로 박쥐 날개의 실루엣을 분간했다. 나는 진짜 삶을 살았다. 현실은 충분했다. 증강현실도, 가상현실도, 강화현실도 모두 불필요했다. 풍요와 연결 속의 빈곤 대신 제한과 단절 속의 자족을 누렸다. 그리고 나는 붓과 색연필을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것이었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의 세계에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긴팔원숭이와 어깨동무도 가능하지 않은가?

어쩌다 한번씩, 정글의 주민들도 색다른 엔터테인먼트가 필요할 때가 있다. 기분이 동할 때면 나의 연구보조원들이 영화 관람을 공손하게 신청했고, 나도 이에 동하면 시네마를 위해 나의 노트북을 흔쾌히 할애했다. 그러면 전력 수급이 제법 받쳐주는 날을 골라, 우리는 커튼을 치고 반인체공학적 소파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도시에서 구한 온갖 해적판 비디오 시디 중 안 되는 것이 많아 나는 정품 구매로 안전성을 기했다. 웬만한 영화는 즐기던 이 친구들은 희한하게도 007 시리즈만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무 데나 막 다니면서 부수고, 아무 여자나 찝쩍거리고, 임무에 임하는 자세가 진지하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액션이라도 제이슨 본은 인정하는 걸 보면 아무렇게나 하는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날 나는 도시에서 사온 만화영화 <라따뚜이>를 공개했다. 대뜸 모두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왜 하필 쥐새끼 나오는 애들 만화영화를 다 사왔어요?” 보지도 않고서 그 정도로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의외였다. 그런데 웬걸, 막상 틀어주니 그렇게 좋아하며 신나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옆집 이웃과 다시 보고, 급기야는 온 동네 주민과 다 돌려본 것이 아닌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쥐 주방장 이야기는 최고의 영화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했다. 우리는 한동안 다른 영화를 보지 않았다. 재미없을까 봐 그랬던 것이 아니다. 삶이, 현실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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