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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바람, 달, 대나무… 삼우예찬

등록 2006-02-19 16:21수정 2006-02-20 14:40

2월 20일 글쓰기 교실
김선엽/전남대사대부고 2학년

고산 윤선도에게는 다섯 벗이 있어서 일생을 함께하니 외롭지가 않았다고 한다. 지금 나에게도 삼우(三友)가 있어 일생을 외롭게 않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삼우는 고산 윤선도의 오우에 있기도 하지만 한 명은 고산 윤선도도 느끼지 못한 매력이 있다. 이 한 명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벗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벗의 이름은 바람이다. 바람. 이 단어 하나만으로도 나는 무언가가 설렌다. 교실에서 그녀가 보고 싶어지면 창문 하나만 열면 된다.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 그것 하나만으로도 가슴속에 행복이라는 것이 가득차게 된다. 체육 시간에 땅에 앉아 부드러운 바람에 나무가 흩날리는 것을 보는 것이 나는 좋다. 부서지는 햇살에 하늘거리는 애기단풍나무와 신록이 물결치는 등나무를 보면 그들에 점점 물들여 가게 된다. 이 모두가 바람의 손길에 의한 것이니 내가 그녀를 벗으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이토록 나는 바람이 정말 좋아서 내 생활의 일부에 그녀의 향을 흩뿌려놓았다. 내 책을 보면 심심치 않게 ‘바람 풍’자와 ‘실프’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프는 바람정령의 이름인데 그림으로도 예쁘고 역시 바람정령이기에 좋아한다. 또한 버디 아이디도 ‘windfairy’이다. 이렇듯 나는 바람을 너무 좋아한다. 그러기에 그녀가 나의 참 벗이다.

다음 벗으로는 달. 고산 윤선도도 벗으로 삼았던 달은 고고하면서도 자태가 빼어나다. 가끔씩 집에 걸어가야 할 때가 있는데 집으로 가려면 어두컴컴한 골목을 지나야 할 때가 있다. 이런 때야말로 달이라는 벗은 어두운 골목을 아련한 달빛으로 촉촉이 적셔준다. 운치도 나고 밝아서 좋으니 그녀의 마음이 참으로 곱다. 깊은 밤의 달 중에서 으뜸은 그믐달일 때이다. 언젠가 시골에 갔을 때 새벽에 잠이 깬 적이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마당을 거닐기로 하였는데 묵빛산 언저리에 마치 여인네의 잘록한 허리와도 같이 가느다란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아……. 그 그믐달을 본 순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의 형상은 정말 무어라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내 미천한 글 실력으로는 오히려 그믐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짓이다. 그 뒤로는 다시 볼 수가 없었지만 그 투명한 날개옷 같던 그믐달을 나는 잊지 못한다. [중략]

마지막 벗인 대나무는 그 푸르름이 너무나도 좋다. 사시사철 바래지 않는 그 푸르름이 좋고 파란 하늘을 향한 그의 열망이 부럽다. 나의 벗 대나무가 고연할 때라 하면 아직은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갈빛 옷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디마디에 하얀 솜털이 아름다운데 차가운 봄비에 연둣빛 잎을 늘어뜨린 때이다. 하지만 역시 대나무에 대해 감탄할 때는 흰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속에서이다. 시골집 바로 뒤에 대나무가 무리지어 있는데 보송한 함박눈 내리는 날 시골집을 찾아가면 어김없이 그의 절개를 느낄 수가 있다. 매끄러운 연둣빛 잎에 새하얀 눈이 쌓여 점점 고개를 숙여 가지만 그 안에서 빛나는 그 청연함. 몇몇은 결국 쩡-쩡- 소리를 내며 쓰러지지만 마지막에도 항거하는 그 소리가 전혀 귀에 거슬리지가 않는다. 이 벗은 도시의 시끄러움보다는 수수하고 고요한 시골을 좋아해서 도시의 나는 그를 보기가 쉽지 않다. 또한 굵기가 굵지 않는 시골 대나무라서 그를 내 곁에도 둘 수 없으니 안타까움이 더한다. 그래도 가끔씩 그를 찾아가면 서운한 기색도 없이 한결같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대해 주니 그가 고마울 따름이다.

이 삼우들을 모두 모아 함께하지 못한 지가 꽤 흘렸다. 몇 달 전에 시골 대나무 밭을 거닐 때 바람이 함께한 적이 있었다. 바람에 울려 퍼지는 댓잎 노래를 들으며 거닐면 마음이 저절로 상쾌해진다. 각각으로도 함께하면 기쁘지만 언제 다 같이 모인다면 더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나의 일생에는 그들이 있어서 즐겁고 외롭지 않으니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

[평] 감각적인 언어·문장… 읽는 재미 쏙쏙


이 글은 자연에서 만나는 세 벗의 아름다움을 상큼한 감각과 서정적인 언어와 문장으로 묘사하여 읽는 재미를 준다. 대학입시를 논술 중심으로 뽑을 수도 있겠지만, 외국처럼 이런 에세이 쓰기를 통해 뽑으면 더욱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할 수 있지 않을까?

박안수/전남대사대부고 교사, 문장 글틴 비평글 운영자 teen.munja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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