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1968년의 시점에서 막연히 2001년을 상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 세기가 시작하는 2001년을 기점으로 21세기 내내 인류가 안고 가야 할 핵심 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한겨레〉자료사진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다시 보면서, 20여 년 전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만났던 한 기자의 말을 새삼 떠올렸다. “공상과학(SF)의 궁극적 주제는 외계 지적 생명체와의 만남이지요.”
외계인 흔적 탐사하는 우주선… 초고성능 컴퓨터의 선상 반란
인간·피조물·지구 바깥의 무엇… 지적 생명의 세 가능태 탐색 큐브릭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과학저술가인 아서 C. 클라크와 공동 작업했다. 영화는 1968년 봄에 개봉되었고, 클라크가 완성한 같은 제목의 소설이 그 해 여름에 출간되었다. 클라크는, “큐브릭은 신화처럼 웅장한 테마로 우주에서 인간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고 회고한다. 결국 큐브릭은 영상과 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영화로 지적 생명체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주제로 한 우주의 대서사시를 쓰는 데 성공했다. 대사에 별로 의존하지 않고도, 사색적이고 초월적 감흥을 주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영화인들이 이 작품에서 이해 못할 부분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지기도 했다. 제프 앤드류를 비롯한 평론가들은, 목성으로 향하는 디스커버리호에서 일어나는 고성능 컴퓨터 ‘핼(HAL) 9000’의 반란과 이에 대응하는 우주비행사들 사이의 드라마가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이 영화의 전반적 내용에 잘 맞지 않는다고 평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평론가들이 엇박자라고 하는 부분들이 사실 이 영화에서 서로 아주 잘 맞는 핵심 내용을 이룬다는 것을 발견할 때, 영화의 철학적 의미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멋진 장면들 때문에 관객들이 놓칠 수 있는 대목은 바로 우주비행사 데이비드 보먼이 핼 9000을 제압하기 위해서 우주선의 ‘논리 기억 센터’에 들어가 핼의 전원을 차례로 끄는 장면이다. 보먼이 마지막 전원을 꺼서 핼이 작동을 멈출 때, 지구의 통제 센터에서 ‘미리 녹음한 보고서’가 모니터 화면에 뜬다.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당신들이 지구를 떠나기 전에 녹음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최고의 보안 유지를 위해 목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오로지 핼 9000만이 알고 있다. 이제 목성의 궤도에 들어섰으므로 모두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18개월 전 달에서 외계 ‘지적 생명체’의 첫 번째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 증거물이 목성에 강력한 전자파를 보냈는데, 디스커버리호의 목적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보고서를 듣는 보먼의 표정은 묘하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혼란스러워진 게 아니라, 보다 명확해졌다. 논리 기억 센터의 붉은 조명 아래에 지적 생명체의 개념을 공유하는 세 가지 존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보고서에서 언급한 우주 어딘가에 있을 지적 생명체이며, 또 하나는 인공지능 핼이다. 지적 생명체를 찾는 오디세이는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연계되어 진행한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아직도 무엇이 지적이고, 무엇이 생명인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큐브릭이 설정한 주제에 혼란이 있다고 본 것이다. 한때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라는 가정을 허황한 것으로 치부하다가, 영화의 상상력에 매료되어 그것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기계적 피조물인 핼에게는(그가 미세한 감정까지 가진 존재로 성장했더라도) 지적인 생명체라는 위상을 부여할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충분히 지적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큐브릭의 영화는 1968년의 시점에서 막연히 2001년을 상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 세기가 시작하는 2001년을 기점으로 21세기 내내 인류가 안고 가야 할 핵심 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인류는 세 가지 차원에서, 즉 자기 내적으로, 자기 피조물에 대해서, 그리고 지구 외적으로, ‘지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오디세이에 들어섰으며, 궁극적으로 우주에 편재하는 지적 생명체의 진실을 알아 가는 여정을 지속할 것이다.
하지만 금세기의 마지막 해에도 이 여정을 계속할 미래 세대가 그 진실을 알게 될 기회가 있을지 여부는, 클라크와 큐브릭이 철학적 유머로 즐겨 쓰던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달라지리라. “지구에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인간·피조물·지구 바깥의 무엇… 지적 생명의 세 가능태 탐색 큐브릭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과학저술가인 아서 C. 클라크와 공동 작업했다. 영화는 1968년 봄에 개봉되었고, 클라크가 완성한 같은 제목의 소설이 그 해 여름에 출간되었다. 클라크는, “큐브릭은 신화처럼 웅장한 테마로 우주에서 인간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고 회고한다. 결국 큐브릭은 영상과 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영화로 지적 생명체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주제로 한 우주의 대서사시를 쓰는 데 성공했다. 대사에 별로 의존하지 않고도, 사색적이고 초월적 감흥을 주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영화인들이 이 작품에서 이해 못할 부분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지기도 했다. 제프 앤드류를 비롯한 평론가들은, 목성으로 향하는 디스커버리호에서 일어나는 고성능 컴퓨터 ‘핼(HAL) 9000’의 반란과 이에 대응하는 우주비행사들 사이의 드라마가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이 영화의 전반적 내용에 잘 맞지 않는다고 평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평론가들이 엇박자라고 하는 부분들이 사실 이 영화에서 서로 아주 잘 맞는 핵심 내용을 이룬다는 것을 발견할 때, 영화의 철학적 의미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멋진 장면들 때문에 관객들이 놓칠 수 있는 대목은 바로 우주비행사 데이비드 보먼이 핼 9000을 제압하기 위해서 우주선의 ‘논리 기억 센터’에 들어가 핼의 전원을 차례로 끄는 장면이다. 보먼이 마지막 전원을 꺼서 핼이 작동을 멈출 때, 지구의 통제 센터에서 ‘미리 녹음한 보고서’가 모니터 화면에 뜬다.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당신들이 지구를 떠나기 전에 녹음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최고의 보안 유지를 위해 목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오로지 핼 9000만이 알고 있다. 이제 목성의 궤도에 들어섰으므로 모두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18개월 전 달에서 외계 ‘지적 생명체’의 첫 번째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 증거물이 목성에 강력한 전자파를 보냈는데, 디스커버리호의 목적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보고서를 듣는 보먼의 표정은 묘하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혼란스러워진 게 아니라, 보다 명확해졌다. 논리 기억 센터의 붉은 조명 아래에 지적 생명체의 개념을 공유하는 세 가지 존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보고서에서 언급한 우주 어딘가에 있을 지적 생명체이며, 또 하나는 인공지능 핼이다. 지적 생명체를 찾는 오디세이는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연계되어 진행한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아직도 무엇이 지적이고, 무엇이 생명인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큐브릭이 설정한 주제에 혼란이 있다고 본 것이다. 한때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라는 가정을 허황한 것으로 치부하다가, 영화의 상상력에 매료되어 그것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기계적 피조물인 핼에게는(그가 미세한 감정까지 가진 존재로 성장했더라도) 지적인 생명체라는 위상을 부여할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충분히 지적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큐브릭의 영화는 1968년의 시점에서 막연히 2001년을 상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 세기가 시작하는 2001년을 기점으로 21세기 내내 인류가 안고 가야 할 핵심 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인류는 세 가지 차원에서, 즉 자기 내적으로, 자기 피조물에 대해서, 그리고 지구 외적으로, ‘지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오디세이에 들어섰으며, 궁극적으로 우주에 편재하는 지적 생명체의 진실을 알아 가는 여정을 지속할 것이다.
하지만 금세기의 마지막 해에도 이 여정을 계속할 미래 세대가 그 진실을 알게 될 기회가 있을지 여부는, 클라크와 큐브릭이 철학적 유머로 즐겨 쓰던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달라지리라. “지구에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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