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셈법 안 통하는 ‘사랑의 역설’

등록 2006-02-12 18:39수정 2006-02-13 17:10

‘로맨틱 코미디’ 영화 <로마의 휴일>이 철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계산적이지 않은 삶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로맨틱 코미디’ 영화 <로마의 휴일>이 철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계산적이지 않은 삶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도박·택시비·특종기사 내기…
일상생활에 깔린 수많은 계산
사랑 앞에선 끼어들 틈이 없다
로맨틱 코미디 속 ‘철학정신’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와일러의 <로마의 휴일>

윌리엄 와일러의 <로마의 휴일>(1953년)은 일상적 삶과 동화적 환상이 교묘하게 섞인 영화다. 어찌 보면 ‘전도된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불쌍한 소녀가 공주가 되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 전통적 신데렐라 이야기라면, 영화의 주인공 앤 공주는 왕궁 밖 서민들의 풋풋한 삶을 소망하고 잠시나마 그 꿈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화적 구성은 영화에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영화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이야기 구조와 그 철학적 의미는 사실 다른 데에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사람들의 일상적 삶이 수많은 계산으로(그것이 친한 사람들 사이의 장난 끼 어린 계산일지라도)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깔고 있다.

기자 역할의 남자 주인공 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친구들과 도박하는 장면에서다. 치밀한 계산으로 판돈을 걸지만 돈을 거의 다 잃은 조는 마지막 남은 5천 리라를 가지고 자리를 뜬다. 그리고 궁을 몰래 빠져 나와 거리에서 잠들어 있던 앤을 데리고 택시를 탄다. 택시 기사에게 앤을 부탁하면서 천 리라의 요금에 또 그 만큼의 팁을 더 얹어주자 계산 빠른 기사는 좋아하나, 그것은 앤을 책임지는 대가로 준 것이다. 계산은 조가 먼저 한 것이다.

앤의 신분을 알게 된 조는 신문사 국장 헤네시와 공주의 특종 기사를 걸고 5000달러 짜리 내기를 한다. 헤네시는 조가 실패할 경우 자기에게 오히려 500달러를 지불하라는 마이너스 옵션을 건다. 이어서 조가 자신이 세 들어 사는 집 주인 조반니에게 돈을 며칠만 빌려주면 두 배로 갚겠다고 제안할 때처럼 이야기는 사소하고 코믹한 계산들도 포함한다.

조가 동료 사진기자 어빙에게 앤의 사진을 몰래 찍어 주면 오천 달러 중 25퍼센트를 주겠다고 제안할 때, 어빙은 재빠르게 “5000달러에 25퍼센트라... 그러면 1500달러네”라고 말한다. 계산 빠른 조가 가만히 있겠는가. 당연히 “1250달러야”라고 맞받아 친다. 영화의 막바지에도 등장 인물들은 계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헤네시 국장은 조의 위장 취재가 있던 날 밤 조의 집까지 찾아와 특종 기사를 독촉하며 “값 올릴 생각하지 마!” 라고 경고한다. 상대의 계산을 막는 것이다. 조가 마음이 변해 특종은 없다고 하자 헤네시는 조에게 마이너스 옵션 500달러를 상기시키고, 조는 자신의 봉급에서 50달러씩 떼어 가라고 한다. 어빙이 조에게 특종 기사에 더 높은 대가를 제안한 데가 있냐고 물을 때도, 조가 어빙에게 취재 사진을 다른 곳에 팔면 더 좋은 값을 받을 거라고 둘러 댈 때도 계산 의식은 개입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계산이 개입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 계산은 사랑의 관계에 개입하지 못한다. 아니, 모든 계산은 진정한 사랑 앞에서 무력해진다. 영화는 처음부터 줄곧 이익 분배의 계산, 커다란 내기, 친한 사람끼리의 코미디 같은 계산들로 이어지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계산이 무력하고 무의미해진다.


계산의 도사가 계산이 뭔지도 모르는 상대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코미디가 드라마가 되는 순간이다. 코미디의 본질은 계산이고 드라마의 본질은 운명이다. 앤과 조의 운명 같은 사랑에 계산이 끼여들 틈은 없다. 계산 없는 사랑은 자기희생, 우정, 신뢰를 불러온다. 조는 횡재할 기회를 포기하고, 친구 어빙은 조를 이해하며, 조는 어빙이 사진을 이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김용석/영산대 교수
그리고 앤은 자신들의 영원한 사랑이 영원한 비밀로 남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마지막 기자회견장에서 어빙은 앤 공주에게 아무 대가 없이 사진을 돌려준다.

이른바 ‘로맨틱 코미디’ 영화 <로마의 휴일>이 철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계산적이지 않은 삶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이 단순한 메시지는, 일반적 견해에 반하는 역설(paradox)을 그 본질로 하는 철학 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다. 즉각적인 실리를 추구하는 삶에 대해 그렇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다. 그리고 철학의 역설이 사랑 이야기에 깔릴 때 주는 감동은 오래 남는 법이다.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만큼이나 사랑에 가격이 매겨지는 시대, 역설의 사랑이 주는 감동을 음미하고 싶다면 <로마의 휴일>이 제격이 아닐까. anemos@ysu.ac.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