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부천 역곡중 2학년 국어 시간에 서진석 교사와 학생들이 ‘한 눈 어머니’라는 교과서 글을 읽기 전에 가족과 관련된 대중가요를 함께 듣고 있다.
우리학교 논술수업 짱 / 부천 역곡중 서진석 교사
“느려도 소걸음.”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우리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논술도 마찬가지. 제 아무리 뛰어난 교사, 긴다 난다 하는 학원 강사도 논술의 밑바닥부터 가르치진 않는다. 자신의 기본 생각과는 관계없이 어떤 사안에 다가가는 접근법과 그것을 파헤치는 분석법, 그리고 절묘하게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칠 뿐이다.
서진석 부천 역곡중 국어교사는 그래서 논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삶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아이들과 함께 한다. 교사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논술에 대한 기술적 훈련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감성이라는 생각에서다.
삶과 동떨어진 글쓰기 굴레 벗고
책읽고 영화보고 말하고 토론하고 ‘일상 속 성찰’ 이 논술의 밑바탕
더뎌도 차근차근 생각주머니 키워 “아무리 입시 논술이 어려운 주제를 다룰지라도, 그것이 우리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삶의 주제에 대한 일상적 성찰의 경험이 더 중요하죠. 따라서, 일상적 성찰의 경험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에게 대뜸 논술 문제를 던져주고 글을 쓰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따라서 그는 시간이 얼마 걸리든 상관하지 않고 ‘독서’와 ‘토론’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다시 말해, 그의 ‘논술 수업’에는 사실은 논술은 거의 없고 독서와 토론만 있는 셈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생각놀이 3년 전 일산 백마고에서 고3을 맡고 있었는데, 개교 8년만에 처음으로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했다. 수시 모집에 합격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논술. 하지만 이 학생에게 그는 기술이나 기교는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창의적 관점이라고 말해 줬다. 그리고 남들은 다 강남 학원에서 4~6주 논술특강을 듣고 있는 사이 그는 ‘한가하게’ 독서와 토론 수업을 진행했다. 여러 책들을 읽고, 영화도 보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독서와 대화를 통해 통해 열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이 단지 지적 유희에 그치지 않고 삶의 교감에까지 다가가게 해준 것 같다”고 서 교사는 전했다. 이 학생은 당당히 서울대에 최종 합격했다. ‘생각놀이’로서의 논술 지도이기에 공부를 잘하는 아이, 못하는 아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성적이 안 좋아 대학 갈 상황이 안되는 애들까지도 사로잡았다. 거리에는 수능 끝난 고3들을 위한 온갖 놀이들이 넘쳐나는데, 민호와 창우는 아침 늦잠까지 포기하고 당장 필요도 없는 논술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왔다. 이들에게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적 충격이었고, 학교 밖 놀이 못지 않게 즐거운 학교 안의 놀이였다. 1년 과정의 독서토론논술반으로 확대 다음 해 서 교사는 다시 3학년 논술반을 맡았다. 전해와 마찬가지로 독서와 토론이 중심이 되는 생각놀이로서의 논술이었다. <가타가>, <모던타임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와이키키 브라더스>,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영화와 학교에서 접할 수 없었던 많은 책들을 보고 여러 가지 노래를 같이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학생들은 다양한 방식을 동원한 생각놀이를 통해 또래를 만들고, 또 그 또래와 놀면서 자랐다. 1년 동안 인간이란 무엇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자유란 무엇인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등을 가지고 함께 생각놀이를 했던 아이들은 친구를 얻었고 또 많이 자란 것이다. 한 해를 마치는 마지막 수업 때 그때까지의 논술수업이 어땠는지 평가회에서 학생들은 다양한 소회를 털어놨다. “친구들이 어떻게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지 알게 돼 충격적이예요.” “논술 수업에서 새 친구를 얻은 것 같아요.” “저를 새로 발견했어요.”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서 교사는 논술 수업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했다. 또 자신도 아이들과 함께 부쩍 성장한 것 같다고 털어놨다. “지도교사였던 내 인생의 가치관이 많이 변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던졌던 질문들은 사실 논술 이전에 삶을 성찰하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었죠.” 원형극장형 논술수업-보고 듣고 읽고 말하고 쓰기 지난해 부천 범박고로 옮겨 그는 1학년을 맡았다. 좀 더 긴 호흡으로 생각놀이로서의 논술을 가르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기왕 입시 논술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공교육의 논술 지도 교사는 코 앞 입시의 폭력적 상황에 끌려다니기보다는, 일상 속의 성찰로 긴 시간 동안 생각을 깊이 익히는 경험을 제공하는 수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진리의 문제, 행복론, 지속 가능한 개발 등과 같은 주제들을 논술 문제로 만나기 전에 삶의 문제로 만나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방식이 원형극장형 논술수업이다. 미하엔 엔데의 <모모>에서 모모와 아이들이 원형극장에서 매일 같이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재미있게 노는 대목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여러 가지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주제들을 제시하고 그러한 주제에 접근할 수 있는 ‘낮은 계단’들을 원형극장처럼 둥글게 펼쳐 놓아주기로 했다. 한 계단을 오르고 나서, 다음 계단을 다시 바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펼쳐진 굽어진 길을 호기심 삼아 천천히 걸어보고, 아무데서나 다시 한 계단을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예컨대 하나의 삶의 주제에 대해서 보고(그림, 사진, 만화, 영화 등을), 듣고(노래, 친구의 말 등을), 읽고(책, 신문기사, 칼럼 등을), 말하고(자신의 생각을), 쓰는(일기, 감상문, 논술문 등을) 과정을 긴 시간 천천히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게 그의 구상이었다. “높낮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자리에서건 무대 중앙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정한 논술교육 아니겠습니까?” 서 교사는 올해 부천 역곡중으로 옮겼다. 좀 더 긴 호흡으로 삶의 변화시키는 생각놀이로서의 논술 수업을 시도하기에 좋을 것 같아 자원했다. 일단 1학기는 정규수업에서 어떻게 삶의 고민들을 담을 수 있을까 하는 탐색과 적응 기간으로 삼았다. 2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생각놀이에 푹 빠져볼 계획이다. 글·사진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책읽고 영화보고 말하고 토론하고 ‘일상 속 성찰’ 이 논술의 밑바탕
더뎌도 차근차근 생각주머니 키워 “아무리 입시 논술이 어려운 주제를 다룰지라도, 그것이 우리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삶의 주제에 대한 일상적 성찰의 경험이 더 중요하죠. 따라서, 일상적 성찰의 경험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에게 대뜸 논술 문제를 던져주고 글을 쓰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따라서 그는 시간이 얼마 걸리든 상관하지 않고 ‘독서’와 ‘토론’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다시 말해, 그의 ‘논술 수업’에는 사실은 논술은 거의 없고 독서와 토론만 있는 셈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생각놀이 3년 전 일산 백마고에서 고3을 맡고 있었는데, 개교 8년만에 처음으로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했다. 수시 모집에 합격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논술. 하지만 이 학생에게 그는 기술이나 기교는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창의적 관점이라고 말해 줬다. 그리고 남들은 다 강남 학원에서 4~6주 논술특강을 듣고 있는 사이 그는 ‘한가하게’ 독서와 토론 수업을 진행했다. 여러 책들을 읽고, 영화도 보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독서와 대화를 통해 통해 열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이 단지 지적 유희에 그치지 않고 삶의 교감에까지 다가가게 해준 것 같다”고 서 교사는 전했다. 이 학생은 당당히 서울대에 최종 합격했다. ‘생각놀이’로서의 논술 지도이기에 공부를 잘하는 아이, 못하는 아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성적이 안 좋아 대학 갈 상황이 안되는 애들까지도 사로잡았다. 거리에는 수능 끝난 고3들을 위한 온갖 놀이들이 넘쳐나는데, 민호와 창우는 아침 늦잠까지 포기하고 당장 필요도 없는 논술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왔다. 이들에게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적 충격이었고, 학교 밖 놀이 못지 않게 즐거운 학교 안의 놀이였다. 1년 과정의 독서토론논술반으로 확대 다음 해 서 교사는 다시 3학년 논술반을 맡았다. 전해와 마찬가지로 독서와 토론이 중심이 되는 생각놀이로서의 논술이었다. <가타가>, <모던타임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와이키키 브라더스>,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영화와 학교에서 접할 수 없었던 많은 책들을 보고 여러 가지 노래를 같이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학생들은 다양한 방식을 동원한 생각놀이를 통해 또래를 만들고, 또 그 또래와 놀면서 자랐다. 1년 동안 인간이란 무엇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자유란 무엇인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등을 가지고 함께 생각놀이를 했던 아이들은 친구를 얻었고 또 많이 자란 것이다. 한 해를 마치는 마지막 수업 때 그때까지의 논술수업이 어땠는지 평가회에서 학생들은 다양한 소회를 털어놨다. “친구들이 어떻게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지 알게 돼 충격적이예요.” “논술 수업에서 새 친구를 얻은 것 같아요.” “저를 새로 발견했어요.”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서 교사는 논술 수업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했다. 또 자신도 아이들과 함께 부쩍 성장한 것 같다고 털어놨다. “지도교사였던 내 인생의 가치관이 많이 변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던졌던 질문들은 사실 논술 이전에 삶을 성찰하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었죠.” 원형극장형 논술수업-보고 듣고 읽고 말하고 쓰기 지난해 부천 범박고로 옮겨 그는 1학년을 맡았다. 좀 더 긴 호흡으로 생각놀이로서의 논술을 가르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기왕 입시 논술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공교육의 논술 지도 교사는 코 앞 입시의 폭력적 상황에 끌려다니기보다는, 일상 속의 성찰로 긴 시간 동안 생각을 깊이 익히는 경험을 제공하는 수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진리의 문제, 행복론, 지속 가능한 개발 등과 같은 주제들을 논술 문제로 만나기 전에 삶의 문제로 만나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방식이 원형극장형 논술수업이다. 미하엔 엔데의 <모모>에서 모모와 아이들이 원형극장에서 매일 같이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재미있게 노는 대목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여러 가지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주제들을 제시하고 그러한 주제에 접근할 수 있는 ‘낮은 계단’들을 원형극장처럼 둥글게 펼쳐 놓아주기로 했다. 한 계단을 오르고 나서, 다음 계단을 다시 바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펼쳐진 굽어진 길을 호기심 삼아 천천히 걸어보고, 아무데서나 다시 한 계단을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예컨대 하나의 삶의 주제에 대해서 보고(그림, 사진, 만화, 영화 등을), 듣고(노래, 친구의 말 등을), 읽고(책, 신문기사, 칼럼 등을), 말하고(자신의 생각을), 쓰는(일기, 감상문, 논술문 등을) 과정을 긴 시간 천천히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게 그의 구상이었다. “높낮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자리에서건 무대 중앙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정한 논술교육 아니겠습니까?” 서 교사는 올해 부천 역곡중으로 옮겼다. 좀 더 긴 호흡으로 삶의 변화시키는 생각놀이로서의 논술 수업을 시도하기에 좋을 것 같아 자원했다. 일단 1학기는 정규수업에서 어떻게 삶의 고민들을 담을 수 있을까 하는 탐색과 적응 기간으로 삼았다. 2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생각놀이에 푹 빠져볼 계획이다. 글·사진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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