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교사의 인문사회비타민 / [난이도 = 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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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누구에게나 유한한 것이며,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두렵게 인식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삶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깨닫게 된 인간은 영생에 대한 동경과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위안하고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또,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절박한 상황이거나 불가항력적인 사태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초월적인 대상을 상정하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력자가 되어 주기를 기도하게 된다. ―<시민 윤리>(교육인적자원부) 129쪽
우리가 인간에 관해서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인간의 죽음이 허무하기만 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인간의 삶도 결국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일 모든 인간의 삶 전부가 허무한 것일 수 없다면, 인간의 죽음도 어떤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교학사) 89쪽
교과서에서 논제 찾기 죽음은 일반적으로 생명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해. 죽기 이전에 생명이 있는 개체는 성장하고 자손을 남기고 번식하지만, 결국은 살아 있는 유기체는 시체로 변하고 말지. 이 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별 차이가 없어. 지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항상 끝이 있게 마련이거든. 그렇다면 인간이 죽음과 관련하여 여느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만이 죽음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와 같은 앎을 통해 죽음을 의식적으로 맞이할 수 있다는 점이야. 인간만이 진정으로 죽을 수 있다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죽음에 관한 종교적 믿음을 제외하더라도, 플라톤 이래로 끊임없이 내려온 접근 방법은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서 죽음을 설명하는 거야. 죽음으로 인간의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이 살아남는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은 커다란 의미를 갖지 못하지. 오히려 그것은 영혼을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는 계기야. 죽음을 영혼의 ‘불멸’과 관련짓는 이러한 생각에서, 죽음을 연습하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태도가 도출되지. 플라톤과는 달리,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자연의 과정’으로 보았어.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죽음 또한 삶의 끝일 뿐이라는 거야. 그런데도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죽음 자체가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죽음을 예상하는 것이 고통스러워서라는 거지. 하지만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야.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또 죽음이 올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이처럼 그는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초연해야 함을 피력하고 있어.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도 없이 삶을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거야. 물론 죽은 자의 관점에서 보면 에피쿠로스의 말은 옳아. 그러나 죽음은 죽은 자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야. 죽음은 오히려 산 자와 관련이 있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죽음을 경험하고, 산 사람의 관점에서 그 죽음을 바라보지. 물론 죽음이 우리에게 닥쳐온다면,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어. 그렇다고 우리가 죽어 보아야 죽음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야. 이 문제를 한번 들여다볼까. 사실, 일상 생활에서 ‘3인칭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실감하지 못해. 죽음은 나와 관계없는 타인의 일로 신문의 사회면이나 장식할 뿐이야. 이 때 죽음은 의학이나 생물학, 인구학 등 학문과 지식의 대상이 될 뿐이지. ‘호흡의 정지’나 ‘심장의 정지’만을 죽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뇌파의 정지’를 죽음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도 여기에서 나와. 물론 3인칭의 죽음도 사람에 따라서는 철학적인 관심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죽음을 제대로 인식하기가 어려워. 이에 비해 ‘2인칭의 죽음’은 우리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오지. 사람은 죽는다는 3인칭의 개념적인 죽음이 아니라 내가 2인칭으로 말하던 사람의 죽음에는,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에피쿠로스의 추론을 그대로 적용하기 힘들어.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나’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나’의 죽음을 바라보게 되지. ‘너’의 죽음을 통해 ‘1인칭의 죽음’ 곧, ‘나’의 죽음을 인식하게 된다는 거야. ‘나’의 죽음은 과거형으로나 현재형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미래형으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그러므로 죽음은 나와 관계없다는 에피쿠로스의 말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축이 되는 미래의 모습을 망각한 거야. 그렇다고 나의 죽음은 미래에 발생할 사건일 수만은 없어. 그것은 현재라는 구조 속에 내장되어 있지. 죽음은 내가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로서 나와 언제나 함께 있어. 이것이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의 모습이야. 나는 아직 젊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물론 있어. 하지만 우리 앞에는 죽음이 매복해 있지. 이탈리아 소설가 디노 부자티의 말처럼 우리는 ‘남이 모르는 노인’이야. 한 시간 후에 나무와 충돌해 죽을 30대의 자동차 운전자도 아주 늙었고, 내일이면 뇌출혈로 죽을 50대의 중년도 아주 늙었고, 보름쯤 뒤에 트럭에 치일 10대 소년도 아주 늙었어. 하이데거의 말처럼, 사람은 태어날 때에 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늙었지. 죽음이 멀리 있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 때에는 우리 삶은 게을러져. 하지만 언제라도 죽음과 만나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은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우리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삶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소중한 선물이야. 이처럼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언젠가 없어질 수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해 소중한 의미를 부여할 때 제대로 드러나. 살아 있는 우리가 죽음을 거론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어. <교과서와 함께 구술 논술 뛰어넘기> 저자, 여수여고 교사 위 논제와 관련된 기출 문제(2004학년도 한양대 논술 문제)는 인터넷한겨레(www.hani.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기출 문제에 대한 박용성 선생님의 동영상 강의는 전라남도교육정보원(www.jnei.or.kr)에 들어가 ‘인터넷교육방송→고교논술→실전논술’순으로 검색하면 무료로 들을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논제 찾기 죽음은 일반적으로 생명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해. 죽기 이전에 생명이 있는 개체는 성장하고 자손을 남기고 번식하지만, 결국은 살아 있는 유기체는 시체로 변하고 말지. 이 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별 차이가 없어. 지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항상 끝이 있게 마련이거든. 그렇다면 인간이 죽음과 관련하여 여느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만이 죽음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와 같은 앎을 통해 죽음을 의식적으로 맞이할 수 있다는 점이야. 인간만이 진정으로 죽을 수 있다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죽음에 관한 종교적 믿음을 제외하더라도, 플라톤 이래로 끊임없이 내려온 접근 방법은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서 죽음을 설명하는 거야. 죽음으로 인간의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이 살아남는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은 커다란 의미를 갖지 못하지. 오히려 그것은 영혼을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는 계기야. 죽음을 영혼의 ‘불멸’과 관련짓는 이러한 생각에서, 죽음을 연습하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태도가 도출되지. 플라톤과는 달리,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자연의 과정’으로 보았어.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죽음 또한 삶의 끝일 뿐이라는 거야. 그런데도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죽음 자체가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죽음을 예상하는 것이 고통스러워서라는 거지. 하지만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야.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또 죽음이 올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이처럼 그는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초연해야 함을 피력하고 있어.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도 없이 삶을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거야. 물론 죽은 자의 관점에서 보면 에피쿠로스의 말은 옳아. 그러나 죽음은 죽은 자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야. 죽음은 오히려 산 자와 관련이 있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죽음을 경험하고, 산 사람의 관점에서 그 죽음을 바라보지. 물론 죽음이 우리에게 닥쳐온다면,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어. 그렇다고 우리가 죽어 보아야 죽음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야. 이 문제를 한번 들여다볼까. 사실, 일상 생활에서 ‘3인칭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실감하지 못해. 죽음은 나와 관계없는 타인의 일로 신문의 사회면이나 장식할 뿐이야. 이 때 죽음은 의학이나 생물학, 인구학 등 학문과 지식의 대상이 될 뿐이지. ‘호흡의 정지’나 ‘심장의 정지’만을 죽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뇌파의 정지’를 죽음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도 여기에서 나와. 물론 3인칭의 죽음도 사람에 따라서는 철학적인 관심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죽음을 제대로 인식하기가 어려워. 이에 비해 ‘2인칭의 죽음’은 우리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오지. 사람은 죽는다는 3인칭의 개념적인 죽음이 아니라 내가 2인칭으로 말하던 사람의 죽음에는,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에피쿠로스의 추론을 그대로 적용하기 힘들어.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나’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나’의 죽음을 바라보게 되지. ‘너’의 죽음을 통해 ‘1인칭의 죽음’ 곧, ‘나’의 죽음을 인식하게 된다는 거야. ‘나’의 죽음은 과거형으로나 현재형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미래형으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그러므로 죽음은 나와 관계없다는 에피쿠로스의 말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축이 되는 미래의 모습을 망각한 거야. 그렇다고 나의 죽음은 미래에 발생할 사건일 수만은 없어. 그것은 현재라는 구조 속에 내장되어 있지. 죽음은 내가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로서 나와 언제나 함께 있어. 이것이 시간적 존재로서 인간의 모습이야. 나는 아직 젊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물론 있어. 하지만 우리 앞에는 죽음이 매복해 있지. 이탈리아 소설가 디노 부자티의 말처럼 우리는 ‘남이 모르는 노인’이야. 한 시간 후에 나무와 충돌해 죽을 30대의 자동차 운전자도 아주 늙었고, 내일이면 뇌출혈로 죽을 50대의 중년도 아주 늙었고, 보름쯤 뒤에 트럭에 치일 10대 소년도 아주 늙었어. 하이데거의 말처럼, 사람은 태어날 때에 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늙었지. 죽음이 멀리 있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 때에는 우리 삶은 게을러져. 하지만 언제라도 죽음과 만나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은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우리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삶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소중한 선물이야. 이처럼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언젠가 없어질 수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해 소중한 의미를 부여할 때 제대로 드러나. 살아 있는 우리가 죽음을 거론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어. <교과서와 함께 구술 논술 뛰어넘기> 저자, 여수여고 교사 위 논제와 관련된 기출 문제(2004학년도 한양대 논술 문제)는 인터넷한겨레(www.hani.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기출 문제에 대한 박용성 선생님의 동영상 강의는 전라남도교육정보원(www.jnei.or.kr)에 들어가 ‘인터넷교육방송→고교논술→실전논술’순으로 검색하면 무료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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