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DMZ포럼’ 참석을 위해 방한한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9월20일 오전 서울 종로의 한 호텔에서 한국의 최근 여성운동 흐름과 현상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과정에서 한 말이다. 이는 새 정부 젠더 정책의 기저 인식과 다름없다. 윤 당선자의 이 발언에 여든을 훌쩍 넘긴 한 여성이 응답했다. “거짓말을 하는 행위”로 “거짓을 참으로 만들지 못한다.”
미국에서 50년 이상 여성운동을 이어온 세계적인 페미니스트이자 작가로 여전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글로리아 스타이넘(88)이다. 1972년 세계 최초로 여성주의 대중잡지 <미즈(Ms.)>를 공동 설립한 그가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수여하는 ‘대통령 자유 메달’을 받고, 202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지난 100년 세상을 변화시킨 여성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반세기가 흘렀지만, 여전히 만족할 수 없는 시대를 건너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시대의 개막과 때로 ‘케이(K)-트럼프’라 불리운 윤석열 후보자의 당선 직후의 유사한 전개 양상이 눈에 띤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직후인 2017년 1월 워싱턴 인디펜던스 애비뉴 근처에선 위민스 마치(여성행진)가 열렸다. 스타이넘은 이 행진의 명예회장을 맡았다. 여성 비하 발언과 각종 성희롱·성폭력 의혹으로 수차례 파문을 일으켰던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에 분노한 50만명의 시민이 한자리에 모였다. “민주주의를 구하라!” “여성 인권도 중요하다!” “여성의 몸은 여성의 권리!” 목소리와 손팻말이 넘쳤다.
한국은 대통령 선거일이었던 3월9일 이후 ‘위민스 마치’가 내내 이어지는 중이다. 성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부정하고, 국가 성평등 추진체계에 대한 청사진 제시 없이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반드시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윤 당선자를 향한 목소리다. 여성계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긴급 토론회와 기자회견, 집회를 열어 새 정부가 성평등 체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강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뿐 아니라 인천, 광주, 대구, 경북 등 지역 곳곳에서도 윤석열 당선자의 여가부 폐지 공약 이행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 <한겨레>가 물은 이유다. 대통령이 여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을 부정하고, 성평등 가치를 무너뜨리려는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느냐고. 기시감을 느낄 법한 윤석열 당선자의 인식과 행보에 대한 평가도 요청했다. 인터뷰 요청 전부터 한국의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발) 움직임과 대선 전후 상황을 주시해 온 스타이넘은 “윤석열 당선자는 (성차별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대부분 남성인 대다수의 국가 원수들과도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4월 초 서면으로 이뤄졌다.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를 걸어서 넘는 행사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위민크로스DMZ(WCD) 대표단이 2015년 5월24일 오후 경의선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온 후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다음 날인 2017년 1월21일(현지시각) 열린 ‘위민스 마치’(여성행진)를 기억하고 있다. 50만명의 함께 행진하며 당시 떠올렸던 생각이 궁금하다.
“위민스 마치는 즉흥적이고 빠르게 진행됐다. 단시간에 모인 사람들의 행진은 트럼프가 어떤 사안에서도 미국 대다수 시민의 여론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트럼프 당선은 미국의 기이한 선거 제도의 허점을 증명하기도 했다. 자격도 없고 국민을 대표할 수도 없는 사람이 백악관에 들어앉는 비극이 벌어졌었다. 트럼프가 당선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미국 대선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냈다고 본다. 트럼프 지지자의 지지 근거 가운데 하나는 그가 ‘성공적인 사업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트럼프는 성공한 사업가도 아니고, 상속받은 부의 수혜자일 뿐이다. 이렇게 트럼프의 존재 자체가 미국에서 더욱 평등한 부의 재분배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그가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트럼프는 공직자로서 자격을 따질 때 그 개인의 인격을 고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스타이넘은 지난해 11월 자신의 책 <센 언니, 못된 여자, 잘난 사람>에서 “2016년 우리가 뽑지 않은 대통령이 백악관을 차지한 듯하지 않은 재앙 앞에서 이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와 소득 불평등 문제를 직시했다”고 쓰기도 했다. 트럼프 당선 직후의 우려는 4년 뒤 미국 사회 전체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가 됐다. 특히 비백인·아시아 여성을 향한 혐오와 폭력이 더욱 거세졌다.
―트럼프 정권을 거치며 마주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페미니스트로서 내가 마주했던 가장 큰 어려움은 가부장제와 인종차별주의의 일반화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란 평등하기보다는 계층 구조 위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만연해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했다. 지난달 나온 <이코노미스트>의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10년째 꼴찌를 했다. “성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그 거짓을 참으로 바꾸진 않는다. 당연히 한국에는, 세계 여느 나라가 그렇듯 성차별이 있다. <이코노미스트> 덕분에 그 차별이 수치상으로, 정량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윤석열 당선자는 분명히 대부분 남성인 대다수의 국가 원수와도 다른 행보를 보인다. ‘세계의 정부’로 여겨지는 유엔(UN)도 성·인종·계급을 기반으로 한 차별과 폭력을 분명히 인지,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진보당 6·1 지방선거 기초의원 예비후보와 당원들이 3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대선 공약이었던 ‘여성가족부 폐지’를 반대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대선 직후 지금 가장 뜨거운 논란 가운데 하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이행하느냐다. 성평등 정책 주관 부처는 사라지고, 저출생 정책 부처를 신설하는 안이 나오고 있다. 이런 구상이 성평등한 사회로의 이행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거라 보나.
“윤석열 당선자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할 수는 있겠지만, 여성가족부의 필요성과 존재 의의를 없앨 수는 없다. 따라서 그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한다고 해도 절대로 여성가족부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실체를 없앨 수는 없다.”
―저출생이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한국에서 임신중지 권리를 요구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간다. 윤석열 당선자는 “태내 생명 보호는 국가 존속과 관련된 일이 됐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미국도 텍사스주 등에서 임신중지와 관련된 퇴행적인 법안이 나오고 있다. 여성의 임신중지권보다 국가의 출생률을 더 중시하는 정치에 대한 의견은?
“윤석열 당선자에게는 “국민이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조차 없다면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건 민주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기반을 무너뜨리는 셈이다. 윤 당선자 본인도 자신의 건강이나 몸에 관련된 결정을 다른 사람이 내리게끔 할까? 그럴 리 없다. 민주주의는 국민 개인의 권리로부터 비롯된다.”
―한국은 백래시가 거센 상황이다. 일부 남성은 페미니즘이 남성이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온라인에서 일부 세력이 이런 프레임을 만들었고, 정치권이 이 프레임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민주주의가 남성이 겪는 문제를 야기시키는 게 아니다. 남자가 우위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사회 규범이 되길 바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감이 남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대가 사라진다면 행복한 남성도 여성도 훨씬 늘어날 것이다. 우리가 어떤 글이나 인용구를 볼 때 이름이나 출처를 같이 보지 않으면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고정관념이 얼마나 우리의 판단에 큰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가 읽고 보는 것의 진실과 효용을 얼마나 축소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가끔 책, 에세이, 시를 읽을 때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름 없는 글을 보는 것처럼 읽으라고 한다. 출처나 필자에 구애받지 않고 글 그 자체를 읽는 게 그 글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수십년간 여성운동을 하면서 백래시를 수차례 마주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당신을 지탱했던 것은 무엇인가.
“백래시 물결에서 우리를 살아남게끔 하는 건 결국 ‘연대 의식’이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 지구적으로 통용되는 가장 가혹한 체벌 가운데 하나가 독방 감금과 같은 격리인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운동은 유대감과 공동체를 형성한다. 인간 개인이 유대감을 필요로하는 것처럼, 사회운동가들에겐 운동 공동체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특히 이번 대선을 거치며 많은 좌절감을 느꼈을 20대 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젊은 여성들에게 당신의 ‘감’(instinct)을 믿으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리의 ‘감’은 컴퓨터만큼이나 빠르고 값진데, 우리는 느리게 계산이나 하는 법만 배워왔다. 자신의 ‘감’을 믿기를 바란다. 그리고 연대할 사람을 찾아, 믿는 대로 행동하라 말하고 싶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