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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서울대 교수 성추행’ 피해자 “머리 쓰다듬는 게 지압인가?”

등록 2022-06-09 14:04수정 2022-06-09 15:54

피해자 반대에도 국민참여재판 열려
배심원·방청객 앞에서 피해 진술했지만
지엽적 답변 차이로 ‘신빙성’ 배척
“앞으로 누구도 신고 못 할까 걱정”
서울대 정문. 김태형 기자 xogu555@hani.co.kr
서울대 정문. 김태형 기자 xogu555@hani.co.kr

“앞으로 안 좋은 문화가 계속돼도 누구도 신고할 수 없을 거잖아요. 오히려 거기서 졸업하려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그런 게 걱정되기도 해요.”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대학원 재학 중 지도교수 ㄱ씨를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 ㄴ씨는 9일 이렇게 말했다. ㄱ씨는 전날 서울중앙지법 형사29부(재판장 김승정) 심리로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성추행 피해 당시 입었던 옷까지 찾아 입고 법정에 나와 증언을 했던 피해자 ㄴ씨는 “거짓말쟁이로 몰려 너무 억울하다. 처벌받아야 할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학교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고 했다.

ㄱ씨는 대학원 제자인 ㄴ씨를 세 차례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의 공소사실 및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ㄱ씨는 2015년 2월 다른 교수 및 대학원생과 연구차 떠난 페루의 버스 안에서 잠든 ㄴ씨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30초간 손가락을 집어넣어 만진 혐의를 받는다. 2017년 6월 스페인 학회가 끝난 뒤 술집에서는 “화상 흉터를 보자”며 ㄴ씨의 왼쪽 허벅지를 만지고, 술집에서 나와 ㄴ씨의 팔을 잡아당겨 강제로 팔짱을 끼게 한 혐의도 있다. 이에 대해 ㄱ씨는 ‘머리는 지압해준 것이고, 허벅지가 아닌 무릎 위 붕대를 손가락으로 건드린 것이다. 팔짱은 ㄴ씨가 자발적으로 꼈다’는 취지로 부인했다. 전날 배심원 7명은 ㄱ씨에 대해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했고, 재판부는 “피고인이 정수리 만진 사실 및 이에 대한 피해자의 불쾌감은 인정되지만 이를 강제추행죄에서 정하는 추행으로 볼 수 없다. (허벅지를 만진 것과 팔짱을 끼게 했다는 혐의는)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증거라고 할 것인데 일관되지 않고 번복되는 점 등 피해자 진술만으로는 합리적 의심 여지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ㄴ씨와 ㄴ씨의 대리인 임재성 변호사는 이날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해마루 사무실에서 전날 1심 판결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피해자 쪽은 이 사건을 조사한 서울대가 ‘교수와 지도제자 사이의 성폭력’이 있었음을 인정해 중징계 처분을 내린 것과 다른 판단이 나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2018년 ㄴ씨의 신고로 조사에 착수한 서울대 인권센터는 ㄱ씨의 신체접촉이 사실로 인정된다며 그해 말 학교에 정직 3개월의 징계를 권고했고, 서울대 징계위원회는 이듬해 9월 ㄱ씨의 성추행 의혹과 연구논문 표절 등을 종합해 ㄱ씨의 해임을 결정했다. ㄱ씨가 해임 처분을 두고 서울대 쪽과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어, 1심 무죄 판결이 복직의 근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피해자 쪽은 이날 “피고인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30초 동안 문질렀다. 기분이 더러웠지만 지도교수라는 권력관계 속에서 즉각 항의하지 못했다. 이 행위가 피고인 주장처럼 제자에게 교수가 머리지압을 해준 행위냐”며 “서울대 인권센터 조사 때부터 10여 차례 가까이 일관된 진술을 했지만, 적극적 진술이 ‘이 진술과 저 진술 사이 차이가 있다’는 먹잇감이 됐다”고 말했다. 학교와 수사기관의 조사, 언론 인터뷰 등에서 서로 다른 질문 취지에 따라 답변이 지엽적으로 달라졌을 뿐인데, 진술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ㄴ씨의 모국어가 스페인어이기 때문에 한국말로 수차례 반복된 진술들 사이에 일부 뉘앙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정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해자 쪽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로 지적했다. 국민참여재판법에 따르면 피고인이 원할 경우 국민참여재판을 열 수 있지만, 성폭력범죄 피해자가 원하지 않을 땐 국민참여재판을 열지 않을 수 있다. 성범죄의 경우 다른 범죄에 비해 국민참여재판에서 무죄율이 높다. 대법원 자료를 보면, 2020년 실시된 국민참여재판에서 성범죄의 경우는 48%가 무죄로 판결됐다. 이는 같은 해 성범죄를 포함한 국민참여재판 전체 평균 무죄율(20% 남짓)의 2배가 넘는다.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 진술이 사실상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은데, 진술증거 판단에 익숙한 법관보다 배심원들이 진술의 일관성 등을 더 엄격히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ㄴ씨의 반대 의사에도 국민참여재판을 결정했고, ㄴ씨는 배심원과 방청객 등 수십명 앞에서 피해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ㄴ씨는 “모르는 사람 앞에서 (피해를) 진술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국민참여재판을) 반대했다”고 했다. 임재성 변호사는 “성범죄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국민참여재판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며 “내 피해를 얼마나 생생하게 설명해야 하는지가 피해자에게 부담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 변호사는 “피해자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해서 얻을 이익이 없고,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아도 피해자는 불이익을 감당해야 한다”며 “항소권을 가진 검사에게 1심 판결에 항소해주실 것을 오늘 중 서면으로 요청할 예정이다. 배심원들께서도 최선을 다해 판단하셨을 거라 생각하지만, 항소심에서 법관들의 엄밀한 판단으로 1심과 다른 판결이 이뤄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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