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일본지조선>에 실린 당시 통감관저 모습.
서울시, 국치 이전 정자이름 따 `녹천정 터’ 결정
시민단체 “아픈 역사 기억을” `통감관저 터’ 추진
시민단체 “아픈 역사 기억을” `통감관저 터’ 추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우리 사회가 밖으로는 ‘병합조약의 불법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우리 내부에서는 병합조약이 조인된 서울 남산 통감관저 터에 표석 하나를 세우는 것을 놓고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서울시가 20일 이 터의 표석 이름을 ‘녹천정 터’로 결정하자 시민단체들은 국치100년의 역사성을 살릴 수 있는 ‘통감관저 터’가 적합해 별도의 표석을 설치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 18일 표석설치자문위원회(자문위)를 열어 현재 남산 서울소방재난본부와 유스호스텔 사이 공터인 통감관저 터에 세울 표석 이름을 ‘통감관저 터’가 아닌 ‘녹천정 터’로 결정(<한겨레> 19일치 10면)했다고 이날 밝혔다. 서울시는 9월께 자문위를 다시 소집해 문안을 확정한 뒤 국립국어연구원의 감수를 받아 10월 초에 표석을 설치할 예정이다.
하지만 100여개 한일 시민단체들이 모인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일실행위원회’(실행위)는 국치일인 오는 29일 이 터에 ‘통감관저 터’라는 표석을 설치하겠다고 예고했다. 박한용 실행위 공동집행위원장은 “우리는 아름다운 역사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아픈 역사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며 “표석 이름을 ‘통감관저 터’로 정해 강제적이고 불법적으로 체결된 병합조약의 현장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일단 실행위의 표석 설치를 허용하되, 나중에 표석 이전을 요청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의 이 터에는 조선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신 박영원이 1851년 녹천정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며, 이후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공사관이 불타면서 일본이 이 터를 빼앗아 공사관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 뒤엔 통감관저, 1910년 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총독관저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수정 서울시 문화재과 조사연구팀장은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가 있었다고 경복궁을 조선총독부라고 하지 않듯, 이곳 역시 ‘녹천정 터’로 하고 치욕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국사학)는 “통감관저 터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이곳에 서울의 수많은 정자 가운데 하나인 녹천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치욕의 자리이기 때문”이라며 “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반박했다. 역사연구가 이순우씨도 “녹천정은 이토 히로부미가 남긴 칠언절구 풍류시 ‘남산각하녹천정(南山脚下綠泉亭)’에 등장하는 등 통감관저라는 객관적 명칭보다 우리에게 더 기분 나쁜 이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경욱 길윤형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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