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후보로 지명된 양승태 전 대법관이 19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이용훈 대법원장과 면담을 마친 뒤 걸어나오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노동·시위엔 ‘무관용’ 엄단…사학·기업엔 ‘관대한’ 판결
보수적 판결 주류지만 여성 종중회원 인정 등 일부 개혁적 목소리도
보수적 판결 주류지만 여성 종중회원 인정 등 일부 개혁적 목소리도
새 대법원장 지명을 앞둔 이달 초, 양승태 대법원장 후보자를 잘 아는 한 지인은 그를 두고 “대가 곧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법원에서 양 후보자와 일을 함께 해봤거나, 그가 주재하는 재판을 경험해본 법조인들은 양 후보자가 이념적으론 확고한 보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대체로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의 이런 면모는 판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공안 또는 집회·시위 사건에서, 그는 확실한 ‘보수’의 관점을 보여줬다. 양 후보자는 대법관 때인 2009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 사건을 유죄로 인정했다. 한청은 2002년부터 이적단체 논란에 휩싸였는데, 양 후보자는 “한청은 진보단체들의 연합체”라는 변호인 쪽 주장을 배척해 이적단체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해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를 이적단체로 규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 판결에서도 그는 다수의견을 통해 “반국가단체 활동을 목적으로 내걸지 않았더라도 실제 활동이 국가의 존립에 해악을 끼칠 위험성이 있다면 이적단체로 봐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집회·시위 사건에선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 현 정부와 ‘코드’를 맞춘 판결이 많다. 양 후보자는 서울 용산구청 앞에서 확성기를 사용해 불법 시위를 한 혐의로 기소된 용산동 재개발구역 세입자들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공무집행방해 혐의의 유죄를 인정했다. 당시 쟁점은 확성기 음향을 폭행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는데, 양 후보자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지나친 소음으로 상대방에게 고통을 줬다면 ‘폭행’으로 볼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판단했다.
코스콤 비정규직 농성자들의 증권선물거래소 건물 로비 점거 농성 사건에서도, 그는 노조원 13명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뒤집었다. “정당한 쟁의행위로 평가할 여지가 있긴 하지만 제3자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건물을 점거한 이상 제3자에 대해서까지 정당행위라고 볼 순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집회 도중 경찰버스를 파손한 민주노총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사건에선 “집회 주최 쪽 책임이 100%”라는 취지로 민주노총의 책임을 60%로 제한한 원심을 파기했다.
상지대 사건에선 양 후보자의 보수적 색채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2007년 5월 대법원 전합은 비리로 퇴진한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이 “정부가 임명한 임시이사들이 정식이사를 선임한 것은 무효”라며 낸 소송에서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은 학교의 공공성보다 사학(재단)의 소유관계에 무게를 뒀다는 비판을 받았다. 양 후보자는 당시 “국가권력이 파견한 임시이사에 의해 학교법인 조직이 개편된다면 국가가 간접적으로 사학을 접수하는 것”이라며 “사학의 자율성은 훼손되고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의 자주성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보충의견을 썼다.
삼성의 경영권 편법승계 사건 등 기업관련 재판에선 비교적 친기업적인 성향이 엿보인다. 대법원 전합은 2009년 5월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과 관련해 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무죄 판결을 했다. 당시 전합에 참석한 11명의 대법관이 격론 끝에 5 대 5로 유무죄가 팽팽히 맞섰는데,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양 후보자가 별개 의견을 내면서 무죄로 정리됐다. 당시 양 후보자는 “주주 배정 방식이든 제3자 배정 방식이든 발행조건에서 주주에게 불이익이나 손해가 발생했다고 해도 회사에 대한 임무 위배가 없는 한 이사를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짙은 보수적 색채를 드러낸 판결이 많지만, 여성·인권 사건 등에선 전향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2005년 7월 대법원 전합이 ‘남성만 종중 회원이 될 수 있다’는 기존 판례를 바꿀 당시에는 김영란 전 대법관 등과 함께 “여성도 종중 회원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파업으로 해고된 한국외국어대 노조원의 해고 무효 사건에선 “파업의 목적과 절차가 정당한 쟁의의 기간 중 이뤄진 노조원 해고는 부당하다”는 원심 판결을 확정하기도 했다. 또 수형시설 내 개방형 화장실 사용으로 수치심을 느꼈다며 수형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사건에선 “정신적 고통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김정필 기자 fermat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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