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서울 용산 효창공원 일대 독립운동 기념공간 조성사업 대외발표에 앞서 열린 프레스투어에서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총감독 등 참석자들이 임정 요인의 묘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24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효창공원(효창원)은 조선시대부터 수난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효창공원 땅은 조선의 왕 정조의 슬픈 가족사에서 시작됐다.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는 5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고 1786년 세상을 떠났다. 문효세자가 묻힌 곳은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는 뜻의 ‘효창묘’로 이름 지어졌고, 1870년 고종에 의해 ‘원’으로 성역화됐다.
러일전쟁 때 서울을 강점한 일제는 1906년 둔지미(현재의 용산 미군기지)에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와 철도 거점을 조성하면서, 효창원 남쪽 영역이던 도원동에 유곽(성매매 지역)과 철도 관사를 만들어 성역을 잠식해갔다. 1921년에는 소나무로 우거졌던 효창원에 골프장을 지어 왕실묘역을 빙 둘러쌌다. 골프장이 1924년 폐장한 뒤로 효창원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이재민들의 천막촌이 들어선 수용소가 됐다가, 1927년 본격적인 공원으로 개발된다. 해방을 1년 앞두고 일제는 왕실묘역을 모두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옮겼다. 당시 효창원과 이어진 길들이 끊겼고 크기는 3분의 1로 작아졌다. 효창원은 섬처럼 닫힌 ‘효창공원’이 됐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주요 시설물과 부적절한 시설물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일제가 떠나자 김구는 독립운동가 묘역을 효창공원에 지었다. 자신도 1949년 공원에 묻혔다. 김구를 비롯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도 함께였다. 공원에는 임시정부에서 일한 이동녕 주석, 차리석 비서장, 조성환 군무부장의 묘역도 있다. 일제가 넘기지 않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오면 자리할 빈 묘지도 있다. 1946~49년 사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자들의 묘역을 조성하면서 성지로 거듭난 것이다.
해방 직후 효창원은 독립운동의 정신적 푯대로서 민중의 참배 행렬이 끊일 새 없었다. 김구와 숙적이던 이승만 대통령은 효창공원을 출입하는 사람들에 대해 불시검문을 지시할 정도로 김구를 의식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와 ‘항일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960년 효창공원에 효창운동장을 세웠다.
평소 휴식공간으로 쓰이다 기념일이 되면 추모공간으로 바뀌는 효창공원의 연못 ‘수상 메모리얼’ 예상도 서울시 제공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은 김구 묘역 위에 반공투사위령탑, 대한노인회관, 육영수 여사 송덕비를 세웠다. 효창원에는 독립운동가 7명이 묻혔다는 기억은 시나브로 사라져갔다. 현재 묘역은 추모행사 때, 효창운동장은 훈련?연습 용도로, 기념관은 단체이용객 위주로 쓰이면서 근린공원 수준인 연간 33만명이 방문하고 있다.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효창공원의 가치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효창공원 테니스장 자리에 백범기념관을 세웠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에 추진한 ‘효창공원 민족공원화 사업’은 체육단체와 주민들 반발로 엎어졌다. 효창운동장을 대체할 운동장 부지가 마땅치 않았다. 서울시와 여러 단체들의 이해관계도 조정하지 못했다.
이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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