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2019년 3월 발간된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젠더 데이터 공백’이라는 개념을 제시해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젠더 데이터 공백은 남성을 ‘기본값’으로 설정한 채 이뤄지는 여러 의사 결정이 여성 데이터 공백을 야기하며, 이는 여성에게 사회·경제·정치적 불이익은 물론 심하면 생명의 위협까지도 초래한다는 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다. 이 책 저자인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책이 나온 뒤 영국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가장 주요한 변화는 데이터에 공백이 존재하며 우리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스코틀랜드 정부는 여성의 심장질환 예후를 조사하기 시작하는 등 젠더 데이터 수집 전략 마련에 착수했다. 영국 의회 역시 여성의 차량 안전 문제를 제기했다.(※젊은 여성이 심장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은 남성의 2배다. 남성은 가슴통증이 심장질환 주요 증상인 데 반해, 여성은 복통과 메슥거림을 겪는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서는 남성이 다수인 의료계가 여성에게 나타나는 전조증상을 제때 인지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충돌 시험에는 키 177㎝, 몸무게 76㎏ 남성 체형을 본뜬 인형이 쓰였다. 페레스는
자동차 안전설계가 남성 체형 위주로 이뤄지면서 여성의 교통사고 부상 위험이 남성보다 크다는 점을 알렸다. 우리나라의 경우 4년 전인 2017년 7월에야 남성 인형만 사용하던 충돌안전성 평가에 여성과 어린이 인형이 추가됐다.)
더 고무적인 것은 언론이다. 미디어는 성 중립적 정책이 꼭 성 중립적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남성만을 대상으로 진행된 과학연구 결과를 보도할 때 점점 더 많은 기자들이 ‘해당 연구는 남성만을 대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밝혀 적는다. 예전에는 이를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해서도 여느 때보다 풍부한 성인지 분석이 이뤄지고 있다. 그런 언급 그 자체로도 중대한 진보다.”
―비상 상황에서는 ‘남성 디폴트(기본값)’ 경향이 더 또렷해진다. 코로나19 시대, 보건의료 분야에서 시급하게 메꿔야 할 젠더 데이터 공백을 하나 꼽아달라.
“나는 백인 남성 신체에 맞춰 설계된 (방호복, 마스크, 장갑 등) 개인보호장비(PPE) 문제를 말하고 싶다. 보건의료 인력 대다수가 여성임을 고려하면 이건 매우 위험한 문제다. 여성 보건의료 인력들은 코로나19 상황에서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업무와 바이러스에 노출된다. 나는 코로나19 발생 초기부터 전세계 여성들로부터 몸에 맞지 않는 방호복이나 마스크를 착용하고 일해야 하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메시지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받아왔다. 팬데믹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공중보건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의료진이 아프면, 누가 우리를 치료해 주겠나.”(※우리나라의 경우 코로나19 고위험구역 의료진이 사용하는 레벨 디(D) 방호복은 성별 구분 없이 4개 사이즈만 있다. 같은 키와 체중이라 하더라도 남녀 체형은 다르다. ‘범용 방호복’은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미투 운동이 뜨거웠던 한국에서는 여성 인권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백래시(성평등에 대한 반발성 공격)도 뚜렷하게 감지된다.
“백래시 현상을 막는 방법은 나도 제시하기 어렵다. 불행히도 백래시는 이미 시작됐다. 그러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쁜 데이터’ ‘나쁜 시스템’에 주목하는 건 도움이 될 것 같다. 남성들은 데이터나 시스템에 대한 메시지에는 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당신은 젠더 데이터 공백 원인으로 의도적 배제가 아닌 단순한 ‘무념’ ‘무지’를 지적했다. 그러나 현실에선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고 무지를 일깨워도 데이터를 수정하지 않은 경우가 꽤 있다.
“무념을 깨주는 것만으로는 젠더 데이터 공백을 메울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코로나19는 처음부터 성별에 따른 영향이 매우 분명한 질병이었다. 남자 사망자가 더 많다. (성별에 따라 바이러스, 치료제 등에 대한 반응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코로나19 발발 초기부터 성별 분리 통계와 성인지 분석을 요구했으나, 아직도 이 제안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무념을 깨는 것만으로는 고칠 수 없다. 우리는 문화를 바꿔야 하고, 규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념을 깨는 것이 그 출발임은 분명하다.”(※우리나라
질병관리청은 코로나19 확진자·사망자 성별 통계를 집계해 공개하고 있다. 한국은 남녀 확진·사망자 수가 비슷하다.)
―데이터는 정책 결정 근거가 되기도 하고, 정책 목표가 되기도 한다. 정부가 정책을 추진할 때 꼭 참고했으면 하는 지표를 꼽아달라.
“하나만 고른다면 ‘무급 돌봄노동’의 성별 균형에 주목하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가 이 불균형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한 방에 성별 임금격차의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