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레라 시대의 사랑>의 페르미나는 배를 타면 사랑에 빠진다. 사진은 배 위에서의 사랑을 그린 영화 <타이타닉>
[매거진 Esc] 김연수의 여자여자여자
한 남자의 끈질긴 구혼을 마다했던 한 여자가 마침내 결혼하기로 마음먹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낸들 알겠느냐마는 나보다 더 훌륭한 소설가인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면 “아무 이유 없어”라고 말했을 것 같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페르미나 다사가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되는 마차 장면을 보면 그렇다. 그날 마차(!)에서 페르미나의 사촌 언니 일데브란다와 우르비노 박사는 끝말잇기 놀이도 하고 신발 빨리 벗기 놀이도 한다. 치를 떨며 그 모습을 지켜본 페르미나는 “좋아요, 박사님. 우리 아버지와 얘기해 보세요”라고만 적은 편지를 박사에게 보낸다. 그렇게 해서 평생 충성을 맹세하는 플로렌티노를 첫사랑으로 둔 페르미나는 우르비노 박사의 아내가 된다.
이유가 있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아간 플로렌티노와 아무 이유 없이 부부 생활을 유지한 페르미나,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갔는지 따져보는 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플로렌티노는 동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희한한 이유를 대며 622건의 연애 행각을 벌이는 반면, 페르미나는 애당초 이유도 없이 결혼했으니 사랑도 없는 결혼 생활을 계속하니까. 우르비노 박사의 말마따나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이 없으면 대부분의 결혼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인생은 서로 겹쳐진다. 선박 운항의 관점에서 보자면 말이다. 결혼한 뒤, 페르미나는 우르비노 박사와 함께 대서양 횡단사 소속의 배를 타고 2년에 걸친 신혼여행을 떠나지만, 플로렌티노는 실연을 슬픔을 달래기 위해 전신기사 임명장을 들고 카리브 하천 회사의 배를 타고 고원지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떠나니까. 한 척은 바다로, 한 척은 하천으로 움직이지만, 어쨌든 이 대조되는 여행에서 두 사람은 동정을 잃고 이후 51년 9개월하고도 4일 뒤에나 맺어질 기나긴 인생 역정을 시작한다.
그토록 기나긴 세월이 흐른 뒤, 그러니까 남편 우르비노 박사가 죽은 뒤, 두 사람은 ‘신충성호’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의 배에 오른다. 노파 냄새가 난다며 플로렌티노의 키스를 거부하던 페르미나는 마침내 그 입술을 받아들이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 맙소사! 난 왜 배만 타면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50여년이 지난 뒤, 다시 첫사랑을 받아들이는 여자의 이유로 이보다 더 훌륭한 건 없다. 여자가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 그게 말이든 배든 자동차든, 핑계 거리가 될 수 있는 걸 제공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페르미나는 부부 생활에서 권태를 느낄 때마다 배를 탔다. 선박 여행은 잿더미 속에 남은 사랑의 불씨를 간신히 되살리는 일이었다. 그녀가 임신한 몸으로 두 번째 대서양 횡단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이런 노래가 유행한다.
“아름다운 여인은 파리에서 무엇을 했기에 돌아올 때면 항상 아이를 낳을까?” 역시 핵심적인 질문인데, 그 대답은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파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선박이다.
카리브 하천 회사의 회장이 된 플로렌티노는 과부가 된 페르미나에게 선박 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한다. 앞에서 말한 ‘신충성호’다. 이 제안에 마치 첫 번째 여행인 것처럼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린 건 불문가지. 목적지에 도착하자, 아쉬움을 참지 못한 플로렌티노는 두 사람만 태운 채 항해를 계속해 달라고 선장에게 부탁한다. 선장과 플로렌티노의 마지막 대화는 다음과 같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왕복 여행을 계속하겠다는 남자에게 넘어가지 않을 여자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김연수/소설가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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