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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악의 포즈라도 있던가…

등록 2008-03-12 21:22

영화 〈밤과 낮〉의 성남은 인생의 퇴로를 찾아 도망치는 남자다.
영화 〈밤과 낮〉의 성남은 인생의 퇴로를 찾아 도망치는 남자다.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어떤 남자들은 늘 도망친다. 상황이 조금만 복잡해지거나 난감해지면 일단 그 자리를 피해 숨고 보는 거다. <밤과 낮>의 성남(김영호)처럼. 몇 해 전 유학생들과 어울려 딱 한 번 대마초를 피웠다는 사실이 경찰 귀에 들어갔음을 알게 되는 순간 그는 파리로 줄행랑친다. 연고도 없고 대책도 없다. 체류경비는 어떻게 조달할지, 하루하루 무얼 하며 보낼지에 대한 계획도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나라면 4박5일도 못 버틸 게 분명한 작은 트렁크 안에는 심지어 ‘세계를 간다’ 류의 여행서 한 권 들어 있지 않다.

돈도 별로 없으며 체류 일정도 불확실한 주제에 (항공료도 비싸고 물가도 비싼) 파리로 떠났다는 사실도 그가 어떤 남자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단순히 꽁꽁 숨어 있을 데를 찾는 거라면, 광활한 중국 대륙도 있고 동남아시아나 서남아시아 일대가 접근성이나 경제성 면에서 파리보다 월등히 낫지 않겠는가. 정작 파리에선 서울 변두리 동네 고시원에 사는 백수아저씨처럼 하릴없이 어슬렁거릴 거면서 말이다. 이런 오빠들의 특징은 차후 파리 경험담을 ‘썰’ 풀면서, 파리에서 자기가 얼마나 무심한 듯 시크하게 파리지앵처럼 융화되어 살았었는지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는 거다. 에펠탑이나 노트르담성당 앞에서 사진 찍느라 바쁜 단기 여행자들을 대놓고 무시하시면서.

남의 연애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 만약 여동생이 있다면 저런 남자만은 피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소심한 남자, 우유부단한 남자, 그리고 ‘하얀 거짓말’을 하는 남자…. 다 나쁘지만, 소심한데 우유부단하며, 제가 하는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이라 믿는 남자만큼 여자에게 치명적이진 않다. 따지고 보면 이 세 가지 성향은 필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은 현실을 직시할 용기, 자기 손에 피 묻힐 용기, 상대에게 나쁜 놈으로 기억될 용기조차 없다. 그래서 위기상황 앞에서 조그만 퇴로라도 났다 싶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도망친다.

임신했다는 아내의 거짓말이 파리의 성남에겐 개구멍 같은 마지막 퇴로이며 한 줄기 구원의 빛이다. 이제는 돌아와 아내의 품에서 잠든 남자는 잘못하고 들어와 엄마 치마폭에 쏙 숨어버리는 일곱 살 남자아이를 떠오르게 한다. 홍상수 감독의 남자주인공들 중에서 내가 성남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는 그에겐 위악의 포즈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선량한 소처럼 눈을 끔뻑이며 ‘엄마가 쓰러지셨어’라고 말하는 남자. ‘마누라가 애를 가졌대’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어린 애인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거라고 믿는 이 남자. 그는 하다못해 자기가 가해자인 줄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남자남자남자’라는 오묘한 이름의 칼럼을 연재하는 동안 몇 계절이 지났다. 할 수 없이 아는 척을 하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남자를 잘 모른다. 현실 속 남자들과 부대끼면서 가장 많이 뱉었던 말은 “대체 남자는 왜 그래?”였을 것이며, 그 때마다 친애하는 남성 제위들은 “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대답을 들려주곤 했다. 우리는 영원히 두 개의 팽팽한 평행선을 그으며 나아가는 존재일까? 그래도 좋다. 이렇게 오해하며 미워하고 탐구하며 사랑할 그대들이 없다면, 별안간 지구가 몹시도 지루하고 무의미한 별로 느껴질 테니까.

정이현 소설가

※ 이번회로 ‘정이현의 남자남자남자’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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