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츠비는 낭만적 비극성의 한 가운데에서 최후를 맞음으로써 헌신적인 열정의 이미지로 남았다. 사진은 영화 <위대한 개츠비>.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남자남자
우연히, 오래 전에 쓴 생활계획표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 당시의 욕망이 생경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누가 볼세라 얼른 덮어 버리게 된다. 1906년 9월12일에 작성된 한 소년의 결심은 이렇다. 오전 6시 기상,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 담배를 끊을 것, 이틀에 한 번 목욕할 것, 매주 5달러씩 저축할 것. 소년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고,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에는 지금보다 나은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했다. 금주법이 시행되던 때, 폭력조직과의 불법적인 거래를 통해 부를 거머쥐었다. 그의 이름은 위대한 남자, 개츠비다.
농담으로라도 오직 사랑을 위해 인생 전부를 바치겠노라 말하는 남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개츠비는 하나의 표상으로 일컬어진다. 한 여자에게 순정을 다 바치는 남자에 관하여 말하려면 누구라도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단연코 한 여자, 데이지만을 사랑했다, 죽도록. 여기서 ‘죽도록’이란 뻔한 비유의 일종이 아니다. 사랑했으나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데이지 때문에 개츠비는 정말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으니.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이 저지른 치정사건에 연루되어 살해된 남자. 그보다 더 가혹한 운명의 사내는 없을 것이며 동시에 그보다 더한 행운의 사내도 없을 것이다. 낭만적 비극성의 한가운데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음으로써 그의 사랑은 영원불멸의 것으로 밀봉된 채 완성되었다. 후대인들은 그에게서 (이제는 어디에도 없는) 헌신적인 열정의 이미지라는 환영을 본다.
조건을 찾아 무정히 떠난 여자에게 보란 듯이 불법조차 마다 않고 마침내 부자가 되어 나타난 남자. 그녀의 집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저택을 마련하고 고독과 절망 속에 스스로를 은둔시킨 남자. 그건 여자들의 로망인 동시에, 남자들에겐 어떤 명분의 서사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알리바이가 있었기에, 부를 이루기 위해 그가 지나온 과정들은 묵과된다. ‘그 재물 자체를 욕망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꿈의 실현을 욕망했으므로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 여자가 거기 있었기에 그 기슭으로 간 것이 아니라, 모든 걸 걸기 위해 그 여자를 목표 지점에 세워놓은 건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마침내 욕망을 이룬 그 성(城) 안에서 개츠비가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으로 진저리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옛 애인 남편의 정부의 남편이 쏜 총알에 맞아 비명횡사하지 않고, 그토록 소망하던 옛 애인을 빼앗아 와 같이 살게 되었다 해도 그의 갈망과 허기는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Great’라는 위대한 형용사를 이름 앞에 새기고 다니는 그의 본명은 개츠비가 아니라 그저 개츠다. 사는 동안 내내 그는 ‘위대한 개츠비’ 되기를 꿈꾸었으나, 죽어서도 ‘위대하지 못한 개츠’로 남겨졌다. 위대할 수 없어 외로웠던 그는 데이지 집 쪽 선창 끄트머리에서 반짝이는 초록색 불빛을 찾아내고 마치 희망인 듯 경이감을 느꼈다. ‘그는 이 푸른 잔디를 찾아 먼길을 달려왔다. 그의 꿈은 너무 가까이에 있어 보여 그것을 붙잡지 못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 꿈이 이미 그의 뒤편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도시 너머 저 어둡고 광막한 곳 깊숙이 어딘가에,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이 밤하늘 아래 굽이치고 있는 그곳에.’ 이 남자의 잘못은 그 신기루를 진짜로 믿었다는 것뿐.
정이현 소설가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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