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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은 두 번 산다

등록 2007-08-22 17:19

나보코프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스탠리 큐브릭의 <롤리타>
나보코프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스탠리 큐브릭의 <롤리타>
[매거진 Esc] 김연수의 여자여자여자

마침내, <롤리타>에 대해서 쓴다. 이 소설을 쓴 나보코프는 이 소설을 반미 소설이라고 비난하는 독자들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고 털어놓았다. 반미 소설이라. <롤리타>가 반미 소설이 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나보코프가 러시아 출신이기 때문에,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미국에는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모텔이 너무 많기 때문이리라. 맞다. <롤리타>는 반미 소설이라기보다는 모텔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40대 남자 험버트 험버트의 말을 빌리자면, 2천년대 초반이나 되어야 출판될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은 간단하게 말해서 두 번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왜? 소녀 X가 나오는 소설이니까.

줄거리 요약으로만 익히 알려진 대로 험버트×2의 성적 취향은 그 이름만큼이나(내 이름을 김김이라고 해보자!) 특이하다.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엉덩이 둘레 29인치(둔부 쏙 들어간 곳 바로 아래), 넓적다리 둘레 17인치, 장딴지 둘레와 목 둘레 11인치, 가슴 둘레 27, 위팔 둘레 8, 허리 23, 신장 57인치…, 대략 이런 스펙이다. 그래서 험버트×2는 모든 여대생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애는 정월 초하루면 열세 살이 된다. 이년쯤 지나면 그애는 더 이상 님펫(10∼14세의 성적 매력이 있는 소녀)이 아닐 테고 ‘소녀’가 되고 그 다음엔 ‘여대생’이 된다. 그보다 더 끔찍스러울 수가 있을까.”

말 그대로 변신하는 소녀들에게 남자들은 백전백패다. 험버트 험버트라고 자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불가능하다. 소녀들은 여러 번 살아간다. 험버트×2가 그 사실을 깨닫는 건 롤리타의 의붓아버지 행세를 하며 모텔을 전전하다가 정착한 마을 비어즐리에서다. 롤리타가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선생님의 말에 그만 험버트×2는 롤리타가 연극에 참여하는 걸 허락했다. 그런데 그 연극의 제목이 뭐냐고? ‘도취된 사냥꾼들’. 그건 험버트×2가 처음 롤리타와 동침한 모텔의 이름이므로, 그렇다면 이 순간 ‘도취된 사냥꾼들’×2가 된다.

이 ‘×2’는 무슨 의미일까? 왜 모든 것은 한 번 더 반복되는 걸까? 그건 롤리타가 이제 소녀가 됐다는 뜻이다. 비어즐리 시절에 롤리타는 이런 말을 한다. “죽는 게 왜 무서운지 알아? 완전히 혼자가 되기 때문이야.” 이 말에 ‘무릎을 기계적으로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던’ 험버트×2는 자기가 롤리타의 마음속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는다. 그럼 험버트×2는 뭘 아나? 엉덩이 둘레 29인치, 넓적다리 둘레 17인치…. 그 치수는 험버트×2와 바닷가에서 탐욕스럽게 애무하다가 헤밍웨이가 분명한 바다의 어부에게 혼이 난 적이 있는 애너벨, 일찍이 발진티푸스로 죽은 그 소녀의 치수다. 그건 다시 바닷가의 소녀 애너벨 리에 대한 시를 쓴 에드거 앨런 포, 13세의 사촌 버지니아와 결혼한 그 천재 시인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건 두 번 반복이다.

김연수의 여자여자여자
김연수의 여자여자여자
결국 우연히 만난 남자와 결혼해서 임신까지 한 롤리타는 험버트×2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란 속임수의 연속이에요. 내 일생을 쓴다면 누가 믿어 주겠어요?” 한 번 사랑에 빠진 소녀에게 삶은 반복된다. 소녀들은 두 번 산다. 두 번째부터는 속임수의 연속이다. 그렇게 치수까지 쟀건만 험버트×2는 롤리타에게 두 번째 중년 남자였다. ‘도취된 사냥꾼들’×2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면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을 수밖에 없다. 다시 읽을 때 우리는 롤리타가 언제 변신하는지 똑똑히 알아볼 수 있다.


인생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어쨌든 <롤리타>가 반미 소설이라는 평에 대한 나보코프의 대답으로는 이게 가장 적당하겠다. “내 개인적인 비극은 그토록 자연스러운 내 말, 자유롭고 풍요하고 끝없이 온순한 러시아어를 버리고 2류의 영어를 해야 하는 내 설움에 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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