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 자랑하는 과시적 규모 대신 뚜렷한 콘셉트와 개성을 보여주는 홍대 앞 카페들. 사진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최범석의 시선⑬
술집, 카페 가득 한 강남의 거리들, 문화 대신 돈 냄새만 물씬
여름철이어서 그런지 아는 파티플래너들이 부산에서 파티를 많이 열었다. 몇주 전에는 파티에 초대받아 금요일 저녁 기차를 타고 부산에 새로 생긴 클럽에 놀러 갔다.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부산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한잔하고 약속 장소인 클럽에 갔다.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그중 대부분이 서울에서 알던 이들이었다. 부산에 온 건지, 서울에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맥이 빠져버려서 같이 간 부산 친구들에게 어디 다른 데 갈 데 없냐고 물었다.
패션의 거리 압구정? 술집, 카페만 즐비
“부산엔 해운대밖에 없어요.” 대답이 싱거웠다. 내가 알기론 광안리도 있고, 서면, 남포동도 있는데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은 해운대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들도 여기서만 노는 게 지겹고, 그래서 요즘은 잘 나오지도 않는데 내가 오는 바람에 오랜만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좀 이상하게 들렸다. 바다도 좋고 게다가 여름인데 왜 아이들이 이렇게 지겨워할까? 하긴 보기 좋은 바다도 한두 번이지 매일 보면 무감동을 넘어 무감각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 역시 사무실이 압구정에 있으니 압구정이 새롭다거나 재밌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일하는 동네일 뿐이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놀러 오는 곳이지만 압구정 하면 나한테 생각나는 건 커피숍과 포장마차, 술집들이 거의 전부다. 본래 압구정의 이미지라면 고급스럽고 세련된 숍들이 많은 일본의 오모테산도나 다이칸야마와 비슷한 것일 텐데, 실상은 술집과 커피숍들로 가득 차 있다. 비단 내가 패션을 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게다.
얼마 전에 강남구청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강남을 패션의 구로 만들고 싶은데 조언을 듣고 싶다고 해서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술집이 너무 많고 어디 하나 전문적인 패션거리가 없다, 압구정동, 청담동 상가 번영회 같은 곳은 길을 살리자고 하면서도 돈만 많이 주면 어디서 들어와도 상관 안 하니 그저 임대료가 비싼 거리가 되고 있을 뿐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만약 청담동의 의류매장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곰탕집이 생기면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하겠지만 그 가게가 잘되면 바로 옆에 설렁탕집이 생기고 그 옆에는 족발집 이런 식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곰탕집, 족발집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통일성 있는 거리문화가 자본 앞에서 너무나 쉽게 굴복하는 게 아쉽다는 말이다.
젊은이들이 갈 만한 곳이 어디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홍대가 떠올랐다. 홍대 역시 상업화 물결에서 예외가 아니지만 그래도 홍대에는 압구정 같은 곳에 없는 어떤 콘셉트가 있다. 밥집도 있고, 클럽도 있지만 큰 돈을 들여서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고 과시하는 분위기 대신 자기만의 콘셉트를 가진 카페나 숍들이 늘어나고 있다. 강남이 싫고 홍대가 좋다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비교했을 때 그렇다.
친한 형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홍대 앞에서 조그만 자기 가게를 운영하는 형은 강남만 오면 숨이 막힌다고 한다. 압구정이나 청담동에 오면 좁아터진 길이 각종 수입차들로 꽉 막히고 여기에 발레 서비스까지 가세해 길을 더 막는다.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차 때문에 위험할 뿐 아니라 사람보다 차 중심주의로 인해 주눅이 든다. 이렇게 무질서하고 좁은 길을 일방통행으로 하지 않고 양방으로 하는 것도 정말 이상하다. 대충 이런 요지였다.
홍대는 주차장 길 정도를 빼면 누구나 느긋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 길과 골목들이 많다. 누가 페라리를 타고 온다고 해도 발레 서비스 따위는 해주지 않고 알아서 주차를 하고 걸어다닐 수밖에 없는 그런 느낌이다. 멋진 차에 명품을 과시하기보다 다 떨어진 컨버스화에 자기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멋진 친구들이 그 거리를 채운다. 무엇보다 공식처럼 만들어진 세련됨이 아니라 튀는 아이들, 자신의 젊음을 뽐내는 친구들이 뿜어내는 활기가 있다.
발레 서비스는 자랑이 아니다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머리카락을 세우고 찢어진 바지를 입은 하라주쿠의 아이들이 없으면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
가끔 홍대에 가보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말이 생각난다. 젊은 이들이 놀고 싶은 곳, 사고 싶은 곳, 즐기고 싶은 곳은 이런 데가 아닐까. 이제 서울에도 도시계획이라는 말이 조금씩 적용되고 있는 것 같다. 살 만한 도시가 된다는 건 편리해지거나 깨끗해지거나 화려해진다는 뜻만은 아니다. 외국 친구가 나에게 놀러 갈 만한 서울의 거리나 동네를 물어볼 때 이 동네, 이 거리만은 전세계 어느 나라의 도시보다 근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지역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패션 디자이너·제너럴 아이디어 대표

돈 자랑하는 과시적 규모 대신 뚜렷한 콘셉트와 개성을 보여주는 홍대 앞 카페들. 사진 박미향 기자

돈 자랑하는 과시적 규모 대신 뚜렷한 콘셉트와 개성을 보여주는 홍대 앞 카페들. 사진 박미향 기자

최범석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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