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앞에서 주춤거리는 준영에게 사랑의 상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한 장면.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남자남자
남자는 여자의 어떤 말을 가장 두려워할까. 혹시 이건 아닐까. “나 선볼 것 같아. 어쩌지?” 침실 파트너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먼 사이의 여자 연희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 남자 준영은 멍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곧 짜증이 났을 것이다. 날더러 대체 어쩌라고, 싶었으리라.
뒤틀린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나직이 쏘아붙인다. “그냥 당신 생각을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야. 선볼 계획 같은 건 첨부터 없었어.” 진부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다. 이로써 여자는 ‘결혼 상대자’ 예비 목록에서 남자의 이름을 지우게 되었으니. 하기야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님 앞에서 부부인 척 연기하고 살자는 남자, 대신 밤일만은 진짜로 하자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제안을 해오는 남자를 세상의 어떤 여자가 믿을 것인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연희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사회적 안정을 위해 결혼이라는 형식 속에 몸을 담갔으되 옛 애인과 이중생활을 하는 그 여자의 행동이 본의든 아니든 제도를 교란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럴 수가. 이제 다시 감상해 보니,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연희가 아니라 준영이었다. 준영에게 주목해 보면, <결혼은…>은 세태풍자극이 아니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초절정 비극이 된다. 성정의 우유부단함과 영혼의 뺀질뺀질함, 그리고 경제적 무능함을 가진 한 젊은 남성이 제도 앞에서 느끼는 주눅을 냉소와 자조로 표현하며 뻗대다가 결국 처절하게 무릎 꿇게 되는 사연인 것이다.
영문학과의 노총각 시간강사인 준영이, 나이·직업·출신 학교를 묻는 맞선녀에게 이렇게 반문하는 장면을 기억한다. “아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요?” 이 너무나도 순진한 역설법은 ‘시장’에서 그 조건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사실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며 동시에 (본인이 못 가진) 그 따위에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제도권 속으로 쑥 진입하기에, 혹은 제도권 밖에서 격렬히 저항하기에, 별 변변한 무기를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는 제도를 얕잡아 보는 태도를 표방한다. ‘나는 까짓 결혼 같은 것 절대 하지 않을 거야, 거짓말하고 살 자신은 없으니까’라고 지레 선을 긋고 들어가는 그 심리를 자격지심의 일종이라 해도 좋겠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 바로 그,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정(情)! 지 내킬 때 왔다가 지 내키는 대로 사람 속 뒤집고서 지 내킬 때 휙 떠나 버리는 나쁜x, 연희를 사랑하게 되고 만 거다. 마지막을 예감한 뒤에야 “근데 무슨 음식 좋아해? 또 뭘 좋아해?”라고 묻는 이 자기중심적인 남자, “네가 오면 널 돌려보낼 자신이 없어”라고 무기력하게 고백하는 이 못난 남자, 드디어 흉부에 돌이키지 못할 치명상을 입었다.
뒤늦은 후회는 소용없다. 이제 와 관계를 청산하려 해도 쉬울 리 없다. 이미 케이지에 갇힌 청설모 신세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 여자가 질금질금 던져주는 사료에 모욕과 감격을 번갈아 맛보는.
정이현/소설가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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