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범석의 시선
[매거진 Esc] 최범석의 시선 17
뉴욕 컬렉션 이야기를 한번 더 하자. 영국 디자이너 브랜드인 ‘랙앤본’ 컬렉션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너무 미국적으로 보였던 탓이다. 하지만 쇼가 끝나고 생각해 보니 그렇게 단순하게 평가할 건 아니었다. 그들은 영국 디자이너지만 미국 시장에 맞는 디자인을 한 것이다. 디자이너는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와 시장에 맞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배울 만하다.
러시아의 고전적 건축물에 매료되다
랙앤본은 영국인 디자이너 둘이 만든 브랜드인데 이 회사를 요즘 미국에서 많이 팔리는 브랜드인 띠어리에서 인수했다고 한다. 갈 곳 잃은 브랜드로 알려진 헬무트 랭도 띠어리에 인수됐다고 한다. 띠어리는 이런 브랜드를 사서 미국 시장에 맞는 가격과 좀더 상업적인 접근으로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다. 물론 예전과 같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들어보니 띠어리의 대주주는 일본인이라고 한다. 영업은 유대인들이 하고 생산은 중국에서 한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하면 중국에서 샘플 생산부터 메인 생산까지 하고 엠디들이 기획 물량부터 가격 등을 정한다. 디자이너는 쇼를 준비하고 인터뷰나 애프터 파티를 하면 업무 끝이다. 그때부터 영업을 하는 유대인들이 바빠지면서 전세계 바이어를 불러서 세일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에서는 디자이너들이 모든 과정을 직접 관할한다. 미국처럼 시스템화가 덜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의 패션산업이 성장하려면 디자인 자체의 질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이런 시스템의 도입도 필요하다.
쇼를 보는 틈틈이 비는 시간에 미술관을 다니면서 전시도 보고, 내가 좋아하는 벼룩시장 쇼핑도 다녔다. 1년 만에 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러시아 건축물을 주제로 한 사진 전시를 봤다. 사실 이 전시를 볼 때까지 러시아는 관심 밖의 나라였는데 이 전시를 보니 러시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사진 속 건물들은 백여년 전쯤에 세워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번영기 러시아의 자존심을 품격 있게 드러내고 있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을 보다 보니 우리가 아는 많은 건축가들이 러시아의 고전적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전시를 보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눈과 철학의 계발은 전에 못 보던 것들을 보이게 만들고,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빛에 의해 매 순간 달라지면서 결국 빛으로 인해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주말 아침에 42번가 벼룩시장에서 싸게 산 빈티지 스타일의 안경과 신발, 가방 등도 이번 출장의 수확이었다. 짐이 커질까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던 낡은 무영등 스탠드는 아직도 눈앞에 삼삼하다.
심상찮은 살수차, 그리고 천둥소리
컬렉션 내용보다 모델 샤샤의 매혹적인 얼굴이 더 여운이 남은 데릭 램의 쇼,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라 졸렸던 베라 왕의 쇼, 또 한국 디자이너의 성공, 그것도 남자보다 기회가 더 적은 여자 디자이너의 성공이라 더 흐뭇했던 두리 정의 쇼 등을 본 뒤 컬렉션 막바지에 야외에서 열리는 ‘y-3’의 컬렉션을 보러 갔다. 이 쇼는 거리의 한 창고에서 길 건너 다른 창고로 가기까지의 길이 런웨이였다. 근처에 있는 살수차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 계단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서 관객이 모두 깜짝 놀랐다. 천둥소리와 같이 내린 비(살수차로 뿌린 비)는 금방 도로를 물바다로 만들었는데 이 와중에 창고에서 모델이 워킹을 하며 나왔다. 어떤 이는 우산을 쓰고 나오고 또 어떤 이는 다른 사람과 떠들면서 가고 또 어떤 이는 개를 끌고 나오면서 실제로 거리에 있을 만한 풍경으로 쇼가 연출된 것이다. 음악 대신 빗소리만을 이용하면서 진행된 이 쇼는 충격적일 만큼 인상적이었다. 디자인의 내용을 떠나서 이 연출은 내가 본 모든 패션쇼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했다. 근사한 쇼를 보는 건 근사한 예술작품을 보는 것만큼이나 감동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컬렉션이었다.
최범석 패션 디자이너·제너럴 아이디어 대표
심상찮은 살수차, 그리고 천둥소리

음악 대신 살수차와 빗소리만을 이용하면서 진행된 y-3의 쇼는 그동안 본 모든 패션쇼 중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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