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자유부인의 존재 기반

등록 2007-10-24 20:08수정 2007-10-24 22:34

〈자유부인〉
〈자유부인〉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과연,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자유부인> 풍문은 익히 들어왔다. 자유부인이라니! 제목 한번 끝내준다. 현숙한 가정부인이 살랑살랑 봄바람을 타고 자유를 찾다 패가망신한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 말이다. 뒤늦게, 한형모 감독의 1956년작 <자유부인>을 보았다. 그리고 오선영 여사가, 반세기 동안 ‘자유부인’이라는 타이틀을 홀로 짊어진 채 저잣거리의 온갖 비난을 홀로 감내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부인’을 있도록 한 건 아무려나 남성 제위다. 오 여사 주위를 둘러싼 건 넷 남짓한 남성들. 이 작품의 제목을 ‘자유부인이라 불렸던 한 여자 그리고 네 남자’ 라고 바꾸는 건 어떨까? 자 이제 그 면면을 살펴보자.

1. 그 여자의 남편-장 교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고전적인 경구를 몸소 실천하시는 분. 그동안, 오 여사의 남편은 온전한 희생자인 줄로만 알았더랬다. 그런데 이거야 원, 오 여사가 양품점과 댄스홀 사이를 한들한들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의 교수님께서도 만만찮은 행적을 과시하신다. 아내보다 훨씬 예쁘고 젊고 착하고 이해심 넓기까지 한 타이피스트 아가씨와 애틋하고 풋풋한 감정을 나누는바, 육체적 접촉만 없었다뿐이지 그 애정관계의 강도는 상당하다. 자기는 밖에서 할 거 다하면서 마누라의 부정을 강하게 단죄하는 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모양새 아닌가.

2. 그 여자의 연하남-춘호
오 여사님 옆집에 세 들어 사는 총각, 춘호군. 직업은 알 수 없다. 취미는 늦은 밤 큰소리로 음악듣기, 국적이 의심스런 외국어 함부로 구사하기 등이 있다. 빵모자·스카프 등등 오묘한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그는 오 여사님을 댄스계로 입문시킨 스승이기도 하다. 사실 그가 오 여사에게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만 있는 여자의 가슴에 불을 지른 죄는 결코 작은 게 아니다. 불 질렀으면 책임을 지든지, 사람 한껏 헷갈리게 했다가 결정적 순간에 확 뒤통수치고 꽁무니 빼 버리는 그 작태는 심각한 죄임이 분명하다.

3. 그 여자의 상대남-한 사장
오 여사가 매니저로 근무하는 ‘파리양행’ 대표이사의 남편. 쉽게 말해 이 남자, 아내의 부하 직원에게 느끼한 추파를 던지며 유혹하는 거다. 돈도 좀 있고 사회적 권력도 없는 것 같진 않지만, 삐쩍 마른 체구에 슬슬 벗겨진 대머리 등 외모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볼 것 없는 사내다. 그런 사내가 저 유명한 키스신의 주인공이라는 건 여성관객 입장에서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다. 내심 마음을 주었던 춘호 총각이 미제 와이셔츠 한 벌 얻어 입자마자 싹 입을 씻지만 않았어도, 우리의 오 여사, 홧김에 그렇게 쉬이 이 아저씨한테 넘어가진 않았을 터인데. 새삼 춘호가 원망스럽다. 한 사장은 이후 한국영화 및 드라마의 ‘바람난 남편’ 캐릭터의 원형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빤한 모습을 보인다. 부인과 애인 양쪽에다 거짓말을 하고, 우유부단하며, 별 실속도 없이 참 쉽게 덜미가 잡힌다.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4. 그 여자의 아들-경수

그 여자가 비난받는 것도 아들 때문이고(“부끄럽지도 않아? 당신은 어미 자격도 없어!”) 그 여자가 울며불며 용서를 비는 것도 아들 때문이고(“모든 게 다 이 어미의 잘못이다, 흑흑.”) 그 여자가 결국 내쫒기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들 때문이다. (“어머니한테 그러지 말고 제발 문 열어줘요, 아버지!”)

역시 여자에겐 죽어도 아들이 있어야 된단 뜻일까. 영원히 굳게 닫힐 것만 같던 대문은 아들 덕분에 배꼼 열린다. 옷고름 한번 풀어보지 않았으되(못했으되?) 어쨌든 부정을 들킨 자유부인은 쫓겨나 ‘거리의 여자’가 되는 최악의 불행만은 모면하였으나, 되돌아간 그 대문 안쪽에서 평생 어떻게 살았을는지.

정이현 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