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을 영화로 옮긴 빌 오거스트 감독의 〈센스 오브 스노우〉
[매거진 Esc]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언제였을까?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을 읽다가 주인공 스밀라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읽었다. “그동안 참 잘 싸웠어. 그런데 이제 이렇게 외롭게 되었다니 너무 안됐군.”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코끝이 시큰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스밀라는 잘 싸운다. 하지만 잘 싸운 결과가 외로움이라니. 내가 스밀라를 좋아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아이러니 때문이다.
스밀라는 좀체 사랑에 빠지지 않는 여자 캐릭터다. 그 까닭은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살면서도 상당 기간 약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살았고, 자살을 하지 않았고, 어린 시절의 미숙한 이상들을 완전히 팔아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른일곱 살. 나와 같은 나이다. 뒤돌아서면 젊은이들이 보이고, 고개를 앞쪽으로 돌리면 늙은이들이 보인다. 몸의 살들은 중력에 굴복하고 만다.
서른일곱 살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건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45퍼센트, 이번에는 그 두려움이 무색해질 것이라는 광적인 희망 45퍼센트,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겸허하고 약한 자각 10퍼센트로” 이뤄진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서른일곱 살은 이제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스밀라의 말을 빌자면, 이제 더 이상 유행성 이하선염에 걸리지 않듯이.
그러니까 서른일곱 살은 질병으로서의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말을 바꾸자면, 서른일곱 살은 갈망하면, 게다가 정말 열심히 갈망하면 결국 외로워진다는 걸 알게 되는 나이니까. 사랑이 아니라 삶이 하나의 질병이라는 걸 깨닫는 나이가 되니까. 스밀라에 따르면 그런 삶을 버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그린란드의 툴레에서 과냉된 물방울을 측정하기 위해 기상 관측용 기구에 물방울과 장비를 넣고 하늘로 올려 보낸다. 거기 위에서 물방울의 기온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마땅히 얼어야 하지만 물방울들은 얼지 않는다. 서른일곱 살은 그런 식으로 삶의 역경에 대처한다고 스밀라는 말한다. 서로 얼어붙지 않는, 외로운 하나의 물방울로서.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국 스밀라는 사랑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게 아닌가? 이 소설에서 스밀라는 자신이 아이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가졌을 뿐이다.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내 고집을 그 사람 처분에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애정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다시 또 한 번의 아이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사랑뿐이다.이건 비틀즈의 노래지만, 스밀라라면 그 이유를 이 우주에 나란 존재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삶의 역경’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 우주에 나란 존재는 혼자’라는 말을 이해하리라. 그렇다면 스밀라의 이런 말도 이해하리라. “나는 그에게 내 몸을 던지며, 나를 마취시켜 달라고,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나서 깨워 달라고 애걸하고 싶은 거센 충동을 느낀다.”
스밀라의 말처럼 서른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는 섹스가 친밀함의 절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후가 되면 그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아이는 스밀라에게 죽은 뒤 가죽을 자기에게 달라고 말했었다. 서른일곱 살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가지게 되는 건 그런 가죽뿐이다. 다시 스밀라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가죽밖에 남지 않는다. 내가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을 연애소설이라고 우기는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김연수 소설가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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