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상동물, 원더걸스 / 사진제공 제이와이피엔터테인먼트
[매거진 Esc]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초등학교 시절부터의 내 친구, 이제 막 8개월짜리 신문기자 생활을 마치고 백수 생활로 접어든 이 친구가 술에 취한 채 노래방에서 부르는 ‘텔 미’를 듣고 나서야 나도 뒤늦게 원더걸스의 광풍 속으로 휘말리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친구마냥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텔 미”에 빠져들 수 없었다. “텔 미, 텔 미”,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테테테테테 텔 미”에 이르니 뭔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쌍팔년도 이후에 태어난 이 ‘놀라운 소녀들’이 오빠와 아저씨들의 판타지를 무럭무럭 키워준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 이 소녀들이 과연 롤리타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소희가 ‘어머나’라고 노래하며 뺨을 가리는 행위가 성적인 행위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토론이 활발하다. 잘라서 말하자면, 원더걸스는 롤리타가 아닐 가망성이 많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순진하기보다는 촌스럽기 때문이다.
원더걸스가 모 대학교의 축제에 갔을 때, 광분한 남학생들은 소리 높여서 “테테테테테 텔 미”를 합창했다. 원더걸스 앞에서 대학교와 군부대의 경계는 사라졌다. “텔 미”의 멜로디는 모든 남자들에게 예비군복을 입혀놓은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었다. 그건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향해 사랑을 고백한다는 서사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여섯 명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날 볼 때면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전기가 올라.”
하지만 그게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복학생도, 예비군도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경험에 따르면, 그렇게 나더러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소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소녀들이 여섯 명이나 있는 세상은 천국일 것이다. 박진영과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같은 곳이다. 하지만 거기 가면 복학생과 예비군만 있을 것 같아 좀 …….
이 소녀들은 유니콘처럼 상상동물에 가깝다. 이 소녀들에게는 정체불명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뭔가, 그러니까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가슴과 허공을 찔러대는 손가락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끈에 묶인 에스엠(새도-매조키즘)의 이미지, 즉 나를 향해 사랑해 달라고 애걸복걸 간청하는 이미지가 있다. 이 소녀들은 실물 크기의 피겨인형처럼 그렇게 잘 만들어졌다.
어린 백성들이 남녀노소 모두 즐겁게 부를 수 있도록 고음을 생략한 이 노래를 쥐어짜듯이 부르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2천년 전쯤에 사마천이 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떠올렸다. “모든 사물이란 성하면 쇠하기 마련인데, 원래가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놀라운 소녀들은 그렇지 않다며 “테테테테테 텔 미”라고 자꾸만 속삭인다.
원더걸스의 광풍이란 단순하다. 자꾸만 혼자서 “테테테테테 텔 미”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혹은 그게 아니기 때문에 자꾸만. 그러다보면 내가 유일하게 따라 부를 줄 아는 이 부분만이 내 목소리고 나머지 소녀들의 노래는 내가 듣고 싶어하는 환각의 목소리라는 걸 알게 된다. 모든 복학생과 예비군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소녀들이 바로 원더걸스가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테테테테테 텔 미”라고 합창하면, 이 놀라운 소녀들은 이렇게 속삭이니까. “너도 날 좋아할 줄은 몰랐어. 어쩌면 좋아. 너무나 좋아.” 와와와, 예비군복을 입은 복학생들만의 천국이라고 해도 그 목소리만은 감미롭다.
김연수 소설가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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