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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의 비밀

등록 2007-12-12 18:55수정 2007-12-12 19:07

복희씨는 남몰래 숨겨온 아편 덕에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복희씨는 남몰래 숨겨온 아편 덕에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매거진 Esc]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평생에 걸쳐 좋아했던 작가의 신간을 읽기 위해 동네서점을 찾는 일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호사다. 오래간만에 박완서 선생의 창작집이 출간돼 얼른 사서는 종일 틈틈이 읽었다. 제목은 <친절한 복희씨>. 예전에 문예지에서 읽었지만,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 머리를 툭툭 쳤다. 아하,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역시 나는 두 번 이상 읽어야만 무슨 뜻인지 아는 모양이다.

표제작 속 복희씨는 버스 차장이 될 생각으로 서울로 도망쳤다가 서른을 넘긴 띠동갑 홀아비가 운영하는 가게에 점원 겸 식모로 들어갔다가 그만 꽃다운 열아홉 살에 그 남자와 결혼한다. 지금은 오랜 세월이 흘러서 장대한 남자였던 남편은 반신불수가 된 상태다. 그런 복희씨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서울로 도망칠 때 훔쳐온 어머니의 아편이다. 조금씩 먹으면 비상약으로 쓸 수도 있지만, 많이 먹으면 아주 편히 죽을 수도 있다는 그 아편을 복희씨는 은장도 삼아 들고 온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복희씨는 납작한 생철갑 속에 든 까만 고약 같은 그 아편 덕택에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예컨대 가게 주인이었던 남편에게 모멸스럽게 당하고 났을 때도 복희씨는 “그 지경을 당하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 방을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생철갑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생철갑은 하나씩 있다고 생각한다.

그 비밀 덕분에 복희씨는 안방도 차지하고, 전처의 처가붙이들도 모두 내보낼 수 있었다. 복희씨는 그들의 속을 빤히 알면서도 이름도 외지 못하는 것처럼, 아는 것도 묻고, 또 거친 상소리는 못 알아들은 척했다. 이렇게 비밀이 있을 때, 다 알면서도 복희씨가 얼뜬 표정을 지을 때, 사람들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복희씨의 말대로라면 그런 비밀을 혼자서 간직했을 때, 행운이 뒤따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꽤 인상적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복희씨가 그 아편을 남편에게 먹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내용에 빠져버린 순수한 독자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아, 우리의 복희씨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다음과 같다.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幻)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 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두 번째 읽으면서 나는 그 아편 때문에 복희씨가 살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니라, 그 아편 때문에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라는 걸 발견하고 꽤 놀랐다. 애당초 아편이 없었다면, 복희씨의 인생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았을 것이고, 무엇보다 스스로도 자신을 마음껏 드러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니구나.

여전히 마음은 복잡하고 잠은 오지 않는데, 문득 이 책에 수록된 다른 단편, ‘그 남자네 집’의 구절들이 떠오른다.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 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결국 아편이 아니라 젊음이라는 것. 이런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면, 그날 잠은 다 잔 셈이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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