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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위민은 나빴다

등록 2007-12-19 18:58

〈색, 계〉의 광위민은 지나치다 싶을 만치 속이 환히 들여다보여 차라리 안쓰러운 남자다.
〈색, 계〉의 광위민은 지나치다 싶을 만치 속이 환히 들여다보여 차라리 안쓰러운 남자다.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색 계>는 ‘배우’라는 역할놀이를 통해 무대의 안과 밖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20대 여성의 성장사인 동시에, 두 편의 불우한 사랑 이야기다. 중심축에 놓인 사랑은 물론, 이 대장과 치아즈 사이의 것이다. ‘몸’으로 먼저 통한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야, 이 영화를 본 입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추임새를 보태었으니 나 하나쯤은 생략하기로 하자.

영화 속 이 대장이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그 속을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워서 괜히 멋진 남자라면, 광위민은 지나치다 싶을 만치 속이 환히 들여다보여 차라리 안쓰러운 남자다. 그의 욕망은 명확하다. 대의를 위해 앞장서 싸우는 사람. 투사인 것이다.

그는 투철한 신념 하나만을 가지고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존경스런 일이다. 조국 독립이야 어찌되었든 일단은 내 새끼발가락의 티눈이 더 중요하다 여기는 범속한 인간들에 비해서야 어찌 그렇지 않으랴. 행동 전략이 때론 어설프고 무모해 보인다고 해서 애국주의자의 그 큰뜻까지 폄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사랑을 대하는 그 남자의 태도는 비겁했다. 홍콩 시절부터 그가 치아즈에게 가졌던 감정이 우정인지 연민인지 사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그것들이 한데 뒤섞인 성질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그는 자신을 수줍고 떨리는 눈길로 바라보는 치아즈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나쁘다. ‘연습’을 위해 다른 남자와 첫날밤을 치르게 하고, 또다른 남자를 몸으로 유혹하도록 만들어서만이 아니다. 위험에 빠지게 될 줄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사지에 몰아넣는 행동도 어이가 없긴 하지만 어쨌든 꾹 참고 넘어가 보련다.

하지만 시종일관 모호함을 견지하는 그 태도에 대해서는 정말 너그러이 용서하기 어렵다. 뒤늦게야 자신을 안아보려는 남자를 향해 왜 3년 전엔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는 치아즈의 대사는 절절하다. 물론 그 3년 전에 광위민과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졌더라도, 그들이 함께 뜨거운 청춘의 열정을 불살랐더라도, 그들에게 닥칠 현실이 크게 변하진 않을 것이다. 치아즈는 여전히 ‘막부인’으로 살아야 할 테고, 이 대장과 영육의 위험한 줄타기를 하였을 것이다.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그래도 그녀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스파이가 아니라 진짜 무역상의 하릴없는 세번째 부인으로 살게 되었대도, 조금은 덜 허무했을 것이다. 후회와 자기부정에 사로잡히는 시간보다, 스스로만 아는 자발적 동력이 그녀를 더 치열한 스파이이자 생활인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허무함보다 치열함이 월등한 가치라는 게 아니다. 어차피 견뎌야 할 시간이라면 그런 가치를 가슴에 품고 사는 쪽이 조금은 더 나으리라.

세상을 구하는 일과, 내 옆의 인간에게 따뜻한 손 내미는 일 둘 중에 무엇이 먼저인지 누군들 목소리 높여 우길 수 있을까. 나에게 대답을 요구한다면, 남들이 뭐라든 솔직하지 못한 게 가장 나쁘다고 말하겠다. 솔직함에 관해서라면, 마지막 순간에도 광위민은 치아즈에게 졌다. 그녀가 고른 죽음의 방식은, 두 남자에 대한 의리를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였으니. 그건 자신의 맨 밑바닥을 마주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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